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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칠(1877 ~ 1932)선생 행적기 선생은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와리(현 안산시 단원구 화동)에서 남향홍씨 태사공 휘 은열 33세손이며 경기 관찰사 해봉공 명원(1573~1623)의 11세손으로 태어났다. 종경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전주 이씨이고 부인은 홍천 용씨이다. 선생(당시 42세은 1919년(기미년) 전국적으로 3.1만세 운동이 촉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사랑방에서 주변사람들과 태극기 3,000여개를 만들었고, 3월 30일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날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도록 19개 동리를 밤 늦겎지 격문을 돌리며 사람들을 주시시키는 등 선도걱 역할을 하였다. 3월 30일 오선 10시경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류익수, 윤병소등에게 태극기를 전달하기도 하면서 이 자리에 모인 2,000여 명의 선두에 서서 시위 군중들을 총 지휘하였다. 선생은 면사무소, 보통학교, 향교 등에서 격렬하게 만세운동을 벌렸으며 특히 일본 경찰의 해산명령과 엄포사격에도 굴하지 않고 몸싸움을 벌이며 항거하는 등 안산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해낸 훌륭한 인물이다. 선생은 경찰에 체포된 뒤 심문조사에서 "3월 30일 독립만세를 부르니 수암면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지를 받고 동리에 모인 30여명을 인솔하고 비석거리 남쪽밭에 이르니 그 때는 이미 1천 2백~3백명 정도의 주민이 모였다."고 진술하였다. 이어 선생은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람으로서 독립을 하려면 많은 사람이 모여 시위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선생은 국유지 소작인들에게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이 때 만세를 부르는 것이 득책이다."라고 하여 소작인들을 설득하였다고 명백히 하였다. 선생은 이 해 5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자택에서 13년 동안 고문휴유증으로 병고를 치르다 향년 55세를 일기로 1932년 타계하였다. 늦게나마 1992년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제83886호)이 추서되었다. 광복60주년을 맞이하여 안산지역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고 홍순칠선생의 유업을 기리고 추모하는 뜻으로 선생의 생가 근처인 이곳 와동공원에 안산지역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30일 기념하여 여기에 이 비를 세운다. 독립기년관 이사장 윤경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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