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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朴 氏 新 羅 年 譜 그때 왕은 비빈(妃嬪)과 종적(宗籍)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술마시 고 즐기다가 견훤이 쳐들어옴을 듣고 왕과 왕비가 도망쳐서 이궁(離宮) 에 돌아오니 시종(侍從:왕을 모시는 신하)과 궁녀와 영관들은 모두 포로 가 되고 견훤병은 약탈을 자행하여 공사의 재물을 거의 빼앗고 왕궁에 들어가서 왕을 찾아내어 군중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게하고 부하를 시 켜 빈첩(嬪妾)들을 간음하게 하고 왕의 동생 효렴(孝廉)과 재신(宰臣:지 위 높은 벼슬아치)을 포로하고 자녀(子女) 백공과 병기(兵器)와 보화를 탈취해 가거늘 고려왕이 사신을 보내서 조위하고 친히 정병을 거느리고 공산의 동숲에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견훤병의 포위(包圍)가 심히 위급하므로 고려의 대장 신숭겸(申崇謙)이 왕을 위해 싸우다 죽으 매 왕은 이틈을 타서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 도망하였다. 이에 신라의 왕 비는 왕의 고종제(姑從弟) 김부(金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이분이 경 순왕(敬順王)이다. 왕은 군신들과 함께 경애왕의 시체를 서궁(西宮)에 모 시어 통곡하고 경애(景哀)라고 시호(諡號)를 올리고 삼릉의 좌측 묘좌에 장사하다. 대아찬(大阿飡) 검교상서(檢校尙書) 좌복야(左僕射) 박술홍(朴 術洪)은 비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평생을 숨어살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三國遺事2卷-2紀異-景哀王-01 第五十五, 景哀王卽位, 同光二 年 甲 辰 { 申 } 二 月 十 九 日 , 皇龍寺說{設}百座說 經. 兼飯禪僧三百, 大 王 親 行 香 致 供, 此百座通說禪敎之始. 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 년 갑 신 ( 甲 申; 924) 2 월 19 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 겸 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 이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 었다. 9년 을미에 경순왕이 국력이 약하고 외로워서 고려에게 나라를 양도하니 신라가 드디어 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