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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1월30일 목요일 2 (제131호) 기 획 경애왕의죽음직후견훤과왕건은죽음의책임을두고치열 한 공방을 벌였다. 각자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경애왕의 죽음 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고자 상대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날선 공방을 이어간 셈이다.븮삼국사기븯에는 견훤,왕건의 서한 이 고스란히 인용되어 있다.븮삼국유사븯역시 이 점을 중시한 나 머지,한자의결락도없이대부분의내용이재인용되어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지금껏 그 누구도 이 서한의 중요성을 포착하지도, 이를 바탕으로 경애왕의 죽음을 살피려 하지 않 았다는 점이다. 경애왕과 같은 시대를 호흡했으며, 경애왕 죽 음의 피의자 혹은 목격자, 아니면 관찰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견훤과, 당시 경애왕의 죽음에 관한 진실의 거의 모든 정보를 거머쥐고 있었을 왕건이 작성한 편지에 초점을 둔다면, 다른 자료와의 차이를 면밀히 밝혀낼 수 있으며, 실상 1차 사료로 서 거의 동시대의 실상을 핍진하게 전하고 판단할 중요한 시 금석을확보하게되는셈이다. 견훤과 왕건의 서한 중 경애왕의 죽음과 연관되는 주요 부 분을적기하면다음과같다. 경애왕 죽음 직후, 왕건과 견훤은 민심의 향배를 염두에 둔 치열한명분다툼을하였음이확인된다. 견훤이 자신을 칭하는 은유(새매, 사냥개, 조개, 조적, 한금 호), 왕건을 칭한 은유(작은 자라, 종달새, 토끼, 도요새), 신 라를 칭한 은유(큰 자라) 등 8종의 금수와 2명의 인물을 거론 하며 자신의 입장을 극력 강변했다면 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왕건은 자신을 칭하는 은유(큰매, 개, 말, 범, 용, 수레바퀴, 산, 번개, 벼락), 견훤을 칭하는 은유 (사마귀, 모기, 벌, 전갈, 이리, 호랑이, 경짐승, 올빼미, 새매, 왕망,동탁,걸왕,주왕)등 14종의 금수 및 벌레와 4명의 악인, 4종의 자연물 등 등 갑절을 넘는 대상을 총망라, 상대와의 격 렬한 명분다툼을하고있다.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왕건이견 훤에게보낸답서’.한편경애왕죽음과관련,견훤은당시세간에 떠도는 말을 유언(流言)이라 천명하고 있다 “徒聽流言”( 븮삼국 사기븯권50열전10견훤‘견훤이왕건에게보낸서한’) 견훤이왕건을향하여자세한충고에도왕건이진위를깨닫 지 못하고 있다고 한 발언에서,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하여 견 훤은이미여러차례당시상황을설명한것으로도보인다“勿 詳忠告” (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견훤이왕건에게보낸서한’). 눈여겨 볼 대목은 왕건이 경애왕 죽음 직후 조사(弔使)를 보내었고,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직접 거병, 친정하였다는 것이다. 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원년조, 븮고려사븯 세가1 태조 신성대왕10년9월조. 조사 파견 거병과 친정의 순서는 주목되는 대목이다. 왕건 의말처럼 존주(尊主)의진정을지녔다면왕건은거병과친정 조제의 순서로 이뤄져야 옳다. 왜 왕건은 경애왕의 죽음 직전 에도, 죽음 직후에도 즉각 거병하지 않았으며, 죽음 이후에조 차도조사를먼저파견한것일까. 왕건이 보낸 조사는 비밀리 파견한 것일 리 없으며,흰 천을 머리와 몸에 두르고 조기(弔旗)를 말에 꼽고 경애왕 시해를 온 천하에 공포, 견훤의 죄악상을 팔방에 퍼뜨리며 내려왔을 것이 틀림없다. 조사의 행로는 송악븡서라벌까지 요소요소를 거치는 만큼, 지방 세력의 동향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고 보인다. 왕건의 조사 파견은 이에 경애왕 시해의 책임을 견훤 에 씌우고 민심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려는 고도의 포석이었 음이확실하다. 주목할 것은 견훤과 왕건이 오월의 조서를 언급하며 공히 청종하겠다는의사를피력하고있다는사실이다. 견훤은 이미 900년, 918년에 오월의 전류(錢 )에게 견 사하였고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927년 12월 견훤은 오월의 왕이 왕건에게도 사신과 조서를 보낸 것을 알고 있었음이 드 러난다. 심지어 909년에도 견훤이 오월에 견사했는데 왕건이 사절 일행을 포획하여 궁예에게 바친 적도 있었다븮고려사븯 권1 세가1 태조 신성대왕 909년조 . 이러한 전력으로 보아 견훤과 오월 과의 친선 관계는 확인되며, 927년 경애왕 죽음 직전 아니면 직후에 오월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입장을 적극 피력했다고 보인다 견훤은 927년 11월 7일 오월의 사신이 조서를 전한 것 으로되어있다.이경우경애왕죽음직전견훤은대외적분위 기조성에나선셈이된다. 왕건은 909년 견훤의 오월 견사 사절을 납치한 전력뿐만 아 니라, 919년에는 오월에서 내투한 문사(文士) 추언규(酋彦 規)를 받아들였고 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신성대왕2년9월조 ,923년 에는 문사(文士)박암(朴巖)을받아들였기에 븮고려사븯권1세가1 태조 신성대왕 6년 6월조 오월의 입장에선 껄끄러운 번국에 속했 다고여겨진다. 사실왕건과오월사이에는이전의외교적접촉이간취되지 않는다. 까닭에 반상서가 조서를 가지고 온 사실의 이면에도 왕건이 아닌 견훤의 적극적 외교 노력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 가여겨진다. 견훤이 왕건에게 서한을 보낸 927년 12월 즈음은 견훤이 동 수(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를 괴멸시킨 직후였으며, 외 교전에서 오월의 적극적 후원을 받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견훤이 왕건과의 대결에서 외교적, 군사적 대 결에서 승리하고, 경애왕 죽음에 대한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 해 서한을 보내었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반면 왕건은 견훤 이 행한 누차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모두 벗기 어렵다 “難遣嫌疑”(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며 맞 서 고 있 다 . 견훤과 왕건은 경애왕의 죽음을 두고 숨바꼭질 같은 진실 게임을펼치고있어자뭇진위를구별하기힘든실정이다. 이로써 견훤의 경애왕 시해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견훤의 말대로라면 허무맹랑한 유언(流言)이며, 왕건의 말대 로는 특정할 수 없는 ‘혐의’에 불과함이 자명해진다. 견훤의 편지에서 보이는 ‘유언’, 왕건의 편지에서 보이는 ‘혐의’는 이 런대목을잘보여준다. ‘유언’은 순전한 허구,‘혐의’는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으 되 불명함을 함의한다. 경애왕 죽음과 관련한 위의 븮삼국사기 븯내용은 븮삼국유사븯에도 거의 흡사한 형태로 인용되어 있다. 그 차이를 표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븮삼국사기븯 가-3), 4)와 다른 븮삼국유사븯의내용은()로 표시하여제시하였다. ▶표1>븮삼국사기븯븡븮삼국유사븯內“견훤이왕건에게보낸서한” ▶표2>븮삼국사기븯븡븮삼국유사븯內“왕건이견훤에게보낸서한” 븮삼국사기븯, 븮삼국유사븯두 자료는 몇 가지 자구를 빼고는 내 용이 상사(相似)하다. 곧 후자가 전자를 전재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다. 의미있는 글자의 변화는 강과 첩의 변화 정도이다. 희(姬)는 주나라의 왕성(王姓)이며, 강(姜)은 제나라의 왕성 (王姓)이었다. 희강(姬姜)은 궁중의 첩실, 귀부인, 혹은 미인 을 가리키는 통칭일 뿐 왕의 왕비를 칭할 수는 없다 諸槁轍次, 븮大漢和辭典븯 3권, p. 693의 희강 항목. 항우가 사랑한 우미인을 우 희(虞姬)라 표기한 것이나, 유방의 애첩 척희(戚姬) 역시도 그런맥락이다. 그들은정실왕후가아니었다는점에서첩으로표기한것이 라짐작된다.심지어희강(姬姜)은경애왕의 애첩조차 아니라 비치기도 한다. 일부에선 미자(美姿)의 궁녀븮삼국유사븯기이2 후 백제견훤‘왕건이 견훤에게보낸답서’(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 이스역주본),미염(美艶)을 갖춘 궁궐의 귀부인븮삼국사기븯권50열 전10견훤‘왕건이 견훤에게보낸답서’(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 이스역주본) 이라보기도하지만해석은통일되어있지않다. 희강(姬姜)이 희첩의 오기로 본 해석에 의하면 이범교,븮삼국 유사븯의 종합적 해석(상), 민족사, 2005, p. 497 , 븯삼국유사븯는 명확히 희첩이라 단정한 셈이다. 좌우지간 희강(姬姜), 희첩이 경애 왕의정비(正妃)가아님은확실하여진다. 위 븮삼국유사븯에 의하면 견훤이 신라 궁궐 내에서 강취한 것 은 경애왕의 애첩 약간 명이었다.이런 사실이 왕건에 의해 견 훤을 향한 주요한 공박의 소재, 하극상의 만행으로 활용된 셈 이었다.더욱 중요한 것은,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 속에는 견훤이경애왕왕비를겁간했다는구절이일점일획조차없다. 다음 기회에 이 부분에 대해선 더욱 자세히 언급할 것이거 니와,일단 이것은 왕건 스스로 ‘견훤의 경애왕 왕비(정비)강 간’은 없었음을 적확하게 실증한 것이다. 견훤이 경애왕 왕비 를 강간했다는 븮삼국사기븯기록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 년 11월조,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조 이 공연한 과장, 왜곡임을 보이는 전거를 다름 아닌 왕건이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묘한 역설이기도하다. 게다가 왕건은 ‘견훤 군사들의 경애왕 비빈 집단 윤간’을 언 급하지도않았다.이로미루어견훤이군사들을풀어궁중의비 빈들을 집단 강간했다는 븮삼국사기븯기록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 2경애왕4년11월조 .은순전한주작(做作)이었음이확인된다. 위 가-1), 2)자료들에서는 경애왕 죽음 직후 견훤, 왕건의 날선 공방이 확인된다. 이는 거꾸로 경애왕 죽음이라는 사안 이 당시 민심을 가를 주요 사건임을 보인다.왕건에 못잖게 견 훤역시그러한맥락을깊이통찰하고있었음을알게한다. 견훤은927년12월,곧경애왕죽음직후왕건에게서신(가- 1)을 전하였다. 가-1)의 서한 ①∼⑤에서 견훤은 왕건의 서라 벌 입경(入京)의 전모와 이로 인해 초래될 궁극적 재앙을 언 급하며 모두를 시작하고 있다. 견훤은 종묘사직과 민생의 일 패도지를 염려하며, 왕건의 파렴치한 행동을 비난, 공박하였 고, 견훤 자신의 서라벌 입경은 불가피한 반사행동이었다고 강변하고있다.이에선몇가지주목되는사항이있다. 먼저 경애왕이 줄곧 견훤을 폄훼하고 비난하며, 군사적 공 세 까 지 가 한 적 이 있 음 에 도 븮삼국사기븯권12신라본기12경애왕2년조 및 3년조, 븮高麗史븯 권1 세가1 태조 신성대왕 10년조 , 견훤의 서한(가- 1)에선 달리 경애왕에 대한 비난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견훤 이 경애왕을 죽였다면 필히 있어야 할 ‘방벌(放伐)’의 대의를 천명하는 구절이 없다.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면 명분, 대 의를내걸첫수순으로경애왕의죄상을낱낱이적시한격문을 내외에 돌리고, 하븡은의 걸주(桀紂), 후한의 환제, 영제 같은 암군(暗君), 혼란(混亂), 무도(無道), 실정(失政) 백출(百出) 의혼군(昏君),용주(庸主)였음을밝혀야했을터이다. 한데 가-1)의 ②-⑤에서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이 왕건과 결탁,신라븡고려의 동호를 맺었고 사직과 민생이 도탄 에 빠질 위기에 처하였다고만 했을 뿐,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경애왕에대한비판이없다. 나아가 가-1)의 ⑧에서 견훤은 분명히 경애왕 시해의 주범 은 자신이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 점은, 일견 뻔뻔한 자 기변명으로 비칠 수 있겠으나 동시에 뻔히 백일하에 드러날 거짓을 천명했을 리 없다는 점에서 경애왕 죽음의 문제를 밝 히는데 경애왕과 동시대인인 견훤의 주장은 또 하나의 음미, 청종할대목이라여겨진다. 견훤이경애왕의죽음직후라는미묘한시점에서,공산전투 에서 자신에게 이미 패한 왕건에게 새삼 서한을 전한 주요 까 닭도 경애왕 죽음과 자신과의 무관함을 틀림없이 드러내려 한것이라여겨지기때문이다. 견훤은 이어 6부에 의풍(義風)으로 효유하였고 간신이 불의에 출몰했음 을 밝히고 있다. 가-1) ⑦의 ‘誓百寮 如 日 諭六部以義風’은 고도의 심리 전, 세력의 회유와 포섭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효유의 골간은 신라의 친 고려 정책의 과오와 그로써 말미암을 악폐(견훤의 자언처럼 가)-1의 ①~ ⑤)에 해당할 것이라 판단된다. 양국 의 선린을 도모한다고 해도 차사(差 使)에 그치지 직접 일국의 수도를 방 문하는 것은 고대 역사에서 초유의 일에 가깝다. 견훤은 이러한 왕건의 서라벌 입경 시도를 두고 필시 생령 (生靈)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종사를 구허(丘墟)로 만들 패역의 짓이라 비 난한바있다(가-1)⑤).이것은뒤집 어 견훤 자신은 생령을 도탄에 빠지 게 하지 않으며, 종사를 구허로 만들 지도 않겠다는, 혹은 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강변으로 해석된다. 견훤 자 신이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 담듯 서 라벌을 약탈, 노략, 도말하였다면 결 코 가-1) ⑤의 역설적인 발언을 대담하게 할 수 없 기 때 문 이 다. 그렇다면 927년 견훤이 서라벌에서한것,혹은경험한것은 견훤 자신의 고백대로 서(誓), 유(諭)를 포함한 일련의 행위, 서라벌 내 간신의 준동,경애왕의 훙변,김부의 권지국사 옹립 등으로 요약된다. 견훤이 굳이 하늘의 밝은 해를 언급한 것이 나, ‘신라 백료’와 같은 여러 증인을 누차 언급하고 있는 점에 서 살인의 피의자가 자신의 억울함과 무죄를 마치 하늘 앞에 토하고맹서하는듯한느낌을받게된다. 김웅렴으로 대표되는 경애왕의 측근이 친고려 정책을 표방 했다면, 경애왕과 대립되는 세력은 반고려, 친백제 정책을 견 지했다고 판단된다. 한쪽이 특정 노선을 정하면 반대편은 자 동적으로 반대쪽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일단 신라 내 경애왕과 대적하는 세력들은 친고려 정책에 반대하는 세 력들과 실상 동치의 의미일 수 있고, 이러한 세력의 존재는 견훤에게도 십분 알려져 있었고, 감지되었다고 판단된다. 견 훤은 가-1) ①에서 국상(國相) 김웅렴(金雄廉) 등에 의한 왕 건의 서라벌 입경 전모까지 꿰뚫을 만큼 고도의 첩보망을 가 동하고 있었다. 특히 ⑥의 ‘선착조편(先着祖鞭)’의 ‘先’에서 왕건의 서라벌 입경 시기까지 얼추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과 첩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930년 후백제가 멸망하는936년에이르는 후삼국동란의시기에서첩자의암약과 첩보 전의 운용은 충분히 성행하였다고 보인다. 견훤이 신라 내 상황을 파악 하고 있는 점, 신라 경애왕이 왕건과 견훤의 和戰의 상황을 파악하여 전 쟁을독려하는서한을보내고있는점등은거미줄같은첩보망의존재를 떠나서는생각하기어렵다. 고대첩자, 이른바Humint까지포함한 다양 한 활동은 다음의 논문이 참고된다.(김영수, 〈고대 첩자 연구 시론〉, 븮백산학보븯 77, 2007, pp. 229-264; 〈고대첩자고〉, 븮군사븯27, 1993, pp. 5-42). 견훤은 신라 내 정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기 동전,속도전을 즐겨 행했던 그가 이전의 전술을 쫓아 무력으 로 도성을 돌파하는 대신 새삼 고울부(지금의 영천)에 둔영 을 꾸리고 심리전을 구사하는 장기적, 역설적 행동을 보였다 고 여겨진다. 견훤이본격 거병한 것이 음력9월이었다.가을에 거병한전 쟁은 속도전이 관건이다.마초와 군량,기동 등 동절기에 접어 들수록 병참의 난제가 대두되어 전쟁 수행이 어렵다. 신라보 다 우세한 전력에다,시기 역시 겨울에 임박한 때라 견훤이 굳 이 진격을 늦추어 위험 부담을 감수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진 격을 늦춘다는 것은 위기에 처한 신라에게도 전력을 정비할 시간을 주어, 견훤의 전격전이 지닌 장점을 상쇄시킨다. 그럼 에도 견훤이 군사적 제압이 가능한 상태에서 돌격을 멈추고 선전전을 행했다면, 그 목적은 신라 내부에서 극한의 혼란이 일어나 왕의 대척점에 있는 세력들이 왕을 시해하게 하는, 자 중지란의획책이었을개연성이있다. 견훤이 군신지도(君臣之道)를 지켜왔음을 고백한 것 븮삼국 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조및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보이 는‘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에서“義篤尊王,情深事大”이란구절이 등 장했다는 것은 신라 경애왕에 대한 견훤의기본 노선을 드러낸 것이 아닌 가 한 다. 을 무조건 허언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렵다면, 견훤이 자기 자신이 아닌, 제3의 손을 빌린 경애왕 시해를 도모했을 개연성은 높아진다.927년 견훤이 경애왕을 거세하되,시군의 멍에를 벗어날 보다 은밀하고 노회한 술책이 동원됐을 수 있 으며,이에신라내책응한세력의개연성을추찰할수있다. 견훤은 신라븡고려 동맹의 폐단과 문제로 말미암아 벌어질 불행에대하여가-1)⑤를통해설파하고있다.견훤의침노와 핍박 하에 교묘한 심리전이 줄기차게 감행되었다면 신라 내 에서는 신라의 외교 노선을 놓고 심각한 내홍이 일어났을 것 이고,그 화살이 경애왕에게 향했으리라 짐작된다.그와관련하 여밖의主犯이 견훤이라면, 견훤과 짝하여경애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안의主犯, 혹은從犯, 아니면심지어‘공동정범’이 따로 있을수있다. 소 위 븮손자병법븯 始計의 ‘亂而取之’ 등의 離間 책략이 구사되었을 개연성을 배제하지않는다.국난(國難)의 시기일수록 정치 세력에게 있어 각자도생의 철칙이 드러나기 마련인 점에서 신라 내 박씨 왕 권에 반대하는 세력과 견훤 간 모종의 정치적 흥정이 있었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이 경우 견훤에게 미필적 고의에 의 한 살인은 정죄할 수 있겠으나, 경애왕의 직접적 살해로부터 는 자유롭게 된다. 이를테면 경애왕의 비명횡사, 견훤의 설유 와 짝하여 제3의 세력이 내부 교란을 책동, 왕을 유인븡살해했 을개연성의여지가있는셈이다. 위에서관설(觀說)한바를토대로할때,질풍노도처럼신라 지경을훑으며맹공을펼치는눈에훤히보이는커다란도적이 견훤이라면,이와 책응(策應)하여 사서의 행간에 포착되지 않 은‘포도밭을허무는작은여우’가있었다는말이된다. 가-1)② ‘國相 金雄廉等’ 이란 구절은 경애왕대 핵심 세력, 혹은 견훤의 경애왕 시해의 일단을 재검토하게 한다. 견훤이 지적한 친고려 정책은 경애왕의 의중이 반영된 것임은 의심 의 여지없다. 김웅렴은 필시 경애왕의 지근에서 보좌한 핵심 세력일 것이다. 국상이란 관직이 무엇인지 단언할 수는 없으 나, 진골 신분으로 대아찬 이상의 관위임은 분명하다. 국상이 란 재상과 같은 의미로 생각되고, 대체로 상대등이나 병부령 (兵部令) 등의 관직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도 이런 단정을 뒷 받침한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븮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븯 김웅렴 항 목. 직전 경명왕대 경애왕이 역임한 상대등과 비슷한 역할과 책무를 담 당했다고 보아 무방하다고 여겨진다 . 견휜은 서라벌에 진입한 이후 경애왕의동생(朴)孝廉,재상 김영경(金英景)을포로로잡아 갔다. 김영경 역시 김웅렴과 마찬가지로 김성 집단에 속한다. 경애왕의 동생 효렴은 물론이고, 김웅렴, 김영경 등도 견훤이 거명하여 적시하거나, 인질로 잡아갈 만큼, 경애왕의 핵심 측 근들이었다. 경애왕의 외조부 역시 김성 집단에 속한 헌강왕 이다. 요컨대 다수 김성 집단이 경애왕에 우호적이었던 것을 추찰할 수 있다.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모든 김성 집단이 우호 세력이었다고말하긴어렵다. 이런맥락에서경애왕에반대한일군의김성세력들은위축 된 자신들의 세력을 감안, 급진적이고 선명한 반골 성향을 보 였을 것, 비정상적 수단을 동원한 경애왕 거세에 몰두했을 것 임에는 추호의 의심할 여지도 없다. 헌강왕의 맏사위로서 신 덕왕이 왕위를 계승한 이래, 아들들인 경명왕, 경애왕으로 왕 위가세습되어온것역시주목할대목이다.경애왕에게는2명 의 아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경명왕에게는 8명의 아 들, 효렴을 비롯한 경애왕의 동생들까지 확인된다. 박씨 家乘에 의하면 경애왕에게는 2명의 아들이 있은 것으로 나타난다. 곧 交舜(金城 大君), 立舜(鷄林大君)이 있었고, 견훤에게 피살된 입순을 제외하더라도 왕위를 이을 인물로는 아들 교순, 또 동생 효렴이 있었다. 경명왕에게는 밀성, 고양, 속함, 죽성, 사벌, 완산, 강남, 월성대군 등 8명이 있었다고 한 다.위의사실들을액면그대로 믿기어렵다는하더라도,일단 경애왕의뒤 를이어왕위를계승할후보자들이 박씨집단 내에충분히존재했음은의 심의여지가없다 .결국 적잖은 반란과 소요,혼란에도 불구하고, 왕위가 정상적인 수순을 거쳐 김씨 집단에게 회복, 반환될 가 능성은 옅어졌던 셈이다. 한데 견훤의 침입은 이들 김씨 세력 (김부를 중심한 세력)에게 있어서는, ‘이리와 호랑이’로 명명 된 견훤의 조아(爪牙)를 빌려 박씨 세력을 일거에 제압, 거세 할 절호의 기회가 도래한 셈이었고,김성 집단 내의 분열로 말 미암아 비정상적 수단에 호소해야 할 여러 배경도 충족되어 있었다고보인다. ‘姦臣遁逃 邦君薨變’이 붙어 있는 사실에서 경애왕 죽음과 간신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견훤은 자신이 왕도에 입성할 즈음 불의에 간신이 도주하였고, 왕건을설득하기위한 서 한, 혹은견훤자신의무죄를드러내고대의를천명하기위한 서한이라는 점에서, 간신은왕건혹은경애왕의입장에서보았을때대척점에있는세 력, 인물이 간신으로 표현된것이라짐작된다. 경애왕을죽인제3의인물 을 가리킨 것일 개연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경애왕을 죽인 제3의 세력 주체는 경애왕의 죽음으로 신라 내에서 가장 유리함을 얻을 세력으로 압 축된다. 또한 경애왕 죽음 이후 가장 부적절한 언행을 한 세력으로도 압 축할 수 있다. 경애왕은 자신이 아닌 제3의 누군가에 의해 훙변 을당했다(가-1⑧)고일갈한다. 견훤과 은밀히 책응했을 3의 세력으로는 누구를 특정할 수 있을까.이에대해서는다음에이어서설명하기로하겠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1) 뱚Ⅰ.927년경애왕의죽음과견훤븡왕건의공방 박 순 교 뱚Ⅱ.견훤븡왕건이벌인오월과의치열한외교전 뱚Ⅲ.경애왕왕비가견훤에게 겁간당했다는것은허구 뱚Ⅳ.견훤이왕건에게보낸편지 속의진실들 박 순 교 뱚Ⅴ경애왕의죽음과신라내부의모반세력 목 차 Ⅰ. 927년경애왕의죽음과견훤븡왕건의공방 Ⅱ.견훤븡왕건이벌인오월과의치열한외교전 Ⅲ.경애왕왕비가견훤에게 겁간(劫姦)당했다는것은허구 Ⅳ.‘견훤이왕건에게보낸편지’속의진실들 Ⅴ.경애왕의죽음과신라내부의모반세력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