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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 경L남문화유적록 밀양박씨 졸당공파 세거내역 (密陽朴民 鋼堂公派 世居內譯) 공의 譯는 聽이요 자는 莫컸이며 寬獅은 密城이다. 高麗朝에 들어와 譯 彦 추가 待中으로 密城君이라 世罷하여 封號를 받았다. 조부는 譯가 永均인데 三 宰를 지냈으며, 銀山府院君에 追封되고 說號는 文憲이다. 考의 譯는 翊인데 고려 ~感朝에 文科에 올라 禮部待郞 겸 中書令이 되고, 鄭 團隱, 李救隱, 吉 治隱 등 여러 賢A들과 道義로 사귀어 性理學을 ↑昌明하더니 , 고려의 國運이 다하자 R련廣의 靖節을 지켜 이조의 太祖大王이 다섯 변을 불러서도 나가지 않았고, 節義를 지키다가 세상을 떠나자 左議政에 體職되고, 說號를 忠輔이라 하니 이분이 松隱 선생이시다. 영남의 유생들이 밀양의 德南書院 청도의 龍間 書院 단성의 新漢書院에 社享 하였다. 특히 공의 분묘에서 2000년 9월 조선 시대 뿔畵훌가 처음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配位인 正柳夫A 은 星山 裵民인데 載相 賢補의 따님이시다. 공은 고려조 공민왕 계사년 (1353 년) 6월 24일 밀양시 부북면 금포리 향제에서 고려 八隱과 柱門洞 72賢 중 한분이신 松隱 선생의 사형제 중 막내로 태어 나셨다. 伯씨는 憂堂 {매民는 忍 堂 /됐民는 믿않堂이니 모두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요, 공을 抽堂이라 함은, 곧 중국 송나라 때 周 嚴漢의 眼抽의 뜻을 딴 것이다. 학문은 東方性理學의 宗師 인 團隱 선생의 문하에서 修學하였다. 春堂은 體詩에서 이르기를 忠烈한 松漢 의 집에 淵源있는 四友컸이라 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되, 말소리는 부드럽게 얼굴빚은 화하게 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힘썼으며, 喪을 당하여서는 애통함이 지나쳐 남들이 그 효성에 감복 하였다. 춘당이 更暫옳位에 있으면서 공의 효성을 조정 에 천거하여 정랑에 올랐다. 戶團正郞을 거쳐 更塵參判에 §曾 職되었으나, 이는 先親 松隱 선생이 先天後天은 父子異時라는 가르침에 따라 벼슬을 한 것이다. 戶費正郞에 있을 때 權貴를 彈刻하다가 미움을 사서 수년 간 調居 생활을 하면서도 道義를 講明하고 經書짧究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調居에서 돌아와 世事에 뜻이 없어 산수긴-에 노닐더니 陳年(1400년경)에 嘉樹 고을 大平 松듭촌(현 합천군 대병면 성리 송지촌)에 始居 하였다. 선생은 일찍이 . ' 6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