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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 ìâ l 냥문화유적록 대산성 전투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패하여 산 하나를 경계로 지근한 거리인 방리 북쪽 비치산에 있는 굴(庸)에 은거(隱居)했다. 후세 사람들은 이 굴바위를 義土嚴이라 했다. 굴입구 위쪽 벽에 ‘千里從軍敗夏山 며頭空望五雲間 藏身塊我忘君罪 大罵龍 灣不??’이란 시를 새겨 놓았다 굴 옆에 집을 지어 公을 추모했다. 義嚴짧 역사는 여기서 시작된다.T西年 에 그 집을 芳里 서쪽 (현위치)으로 移建했고 수차례 수리했다. 그리고 1934 년에 重建했다고 義嚴實記에 전한다. 이 사업으로 종친들은 단합을 도모하고 의암조의 정신을 더욱 되살리게 된 다. 뿐만 아니라 微土의 선비들도 公을 敬愛하고 충의를 본받기 위해 輔義란 이름의 찢를 1940년에 만들었다. ‘輔란 말을 붙인 것은 옆에서 돕고 보좌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듯이 대체 로 公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삶은 義로운 것이었고 또한 지금은 돌아 가셔 서 계시지는 않지만 매우 훌륭한 행동이었습니다. 장차 어떤 곳에서라도 이를 돕는 노력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모일 때 마다 公께서 바위에 새긴 시를 암송할 것입니다. 公께서는 언제나 충의를 앓지 않으셨습니다. 公의 이러한 정신을 본받아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단지 술 한잔하면서 談笑하며 즐기는 일로만 그친다면 어찌 훌의 의미를 되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義嚴顆輔義훌序(康辰年秀要節뿜珍李定훔序)에 기록 하고 있다. 찢모임을 매년 음력 3월초 7일에 義嚴鷹에서 했으며 2-3일 간 계속된 행 사였다. 이날 향토 선비들은 의암시 암송과 시의 끝 字인 山,間,?을 題으로 해서 시를 짓기도 했다 (그 내용이 義嚴實記에 있다). 그리고 莫에서 기금을 모아 公의 忠義 精神을 기리고자 遺塊牌를 1945년에 세웠다. 牌 건립당시 牌文은 ‘司뽑춤正義嚴*'、將軍遺塊陣’였는데 후에 향토 유림들이 장군보다 선생으로 함이 좋다 하여 ‘선생’으로 고쳐서 지금은 ‘司樓춤正義嚴 朴先生遺塊陣’로 되 어 있다. 義兵將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한 안타까운 결과이다 . • c 3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