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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 경남문화유적록 다소 진정되자 곧 일곱 분의 유해(遺縣)를 400여리 밖에서 몸소 등에 업어 차례로 풍각현(風角戀) 북쪽기숨에 안장(安賽)하였다. 1618년(여午)에 광해군(光海君)이 인목대비(仁種大紀)를 폐위(廢位)하자 부 당함을 상소(上流)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므로 ‘서궁문폐(西宮門閒) 이윤 두(暴倫戰) 북궐운심(北朋雲深) 일월혼(日月홉)’하며 탄식하였다. 1636년(困子)의 호란(胡亂)때는 의병을 일으켜 북상하는 도중 화의(和議)가 성립되었음을 전해 듣고 ‘병자년(內子年) 백성 되기 부끄럽다’하며 은거(隱居) 하였다. 이후 그는 오로지 향풍진작(香風振作)과 후진육성에 힘쓰며 선대의 유덕(遺德)을 추선록(追先錄)에 담는 한편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여 많은 저 서(著書)를 남기고 1652년에 81세로 운명하였다. 1691년 (숙종17년)에는 사럼(士林)의 공의(公嚴)로 남강서원(南間書院)에 모 셔졌으며 또한 1998년 4월 대구 망우당 공원에 세워진 입란호국 영남충의 단감실(王亂護國 領南忠義 增露室)에 270여 호국충의열사(護國忠義烈士)와 함 께 모셔졌다. 해마다 국담재(짧澤顆)에서는 불천위제사(不遭位쫓祝)를 받들고 남강서원(南間書院)과 호국충의단(護國忠義휩)에서는 향례를 올리고 있다. 유 고집(遺橋集)으로 국담집(짧灌集) 4권2책이 전해오고 있으며 국답집전은 서울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 { 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