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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태사중서령 문하시중 밀성부원군 휘 彦孚(언부)를 중조로 삼는다. 이름난 인물과 큰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 고려말 송은 휘 聰(총)은 이학으로 이름이 있었는데 포은등과 제명(齋名)하였다. 관직이 예조시랑 중서령에 이르렀으나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버리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왕조에서 불렀으나 망복(罔㒒)의 의리를 지켰다. 나중에 좌의증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으로 단성의 신계서원 밀양의 덕남서원 청도의 용강서원등에 향사되어 있다. 그 아들 졸당(拙堂) 휘 총(聰)은 포은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길야은 변춘정 등과 도의지교를 맺었다. 천거로 관직에 나가 정랑으로 있다가 권귀와 뜻이 맞지않아 물라났다. 만년에 밀양에서 삼가 대평 송지촌으로 옮겨와 터를 잡았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신계서원에 종향되어 있다. 그 5대손 휘 천우(天祐)는 진사인데 임진왜란때 창의하여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 5대손은 휘 수권(守權)인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괴로(槐盧) 휘 민우고 조부는 휘 기수고 부공은 윤산 휘 효영으로 학행이 있어 유림의 추중을 받았다.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를 받았고 문집 "윤산집"을 남겼다. 모친은 숙부인 은율송씨로 택량의 따님이다. 공은 1853(철종 4)년 음력 4월 24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기국이 컸다. 윤산공의 훈도를 받아 경사를 널리 읽고 선비의 자세를 익혔다. 자라서는 후산 허유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의 깊이를 더 하였다. 면우 곽종석 노백헌 정재규 농산 정면규등과는 서로 교왕하며 학문을 강마하였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국가가 내외적으로 혼란하였으므로 과거를 버리고 산수 속에서 독서하며 풍속을 선도하고 향촌의 학도들을 가르쳤다. 또 지극한 효성으로 윤산공을 위하여 빈객접대와 가사를 맡아 처리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한 이후로는 은둔하여 지절을 지켰다. 1919년 파리장서에 서명한 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왜경의 잔인한 고문에도 의연하게 대응하니 왜경들마저도 감복하였다. 이미 나라가 망하 민족정신이 무너져가고 있었는데 공의 이런 서비자세는 우리 민족에게 큰 정신적 원기가 되었다. 이때 같이 옥고를 치른 후손들이 모여 망우계를 모아 그 정신을 길이 기리고있다. 1922년 3월 27일 별세하니 향년 70이었다. 원근의 모든 사람들이 공의 별세를 아까워하였다. 배위는 강진안시와 전주이씨이다. 아들은 규복 규건 규곤이다. 규복은 호가 축암이다. 규복의 아들은 종운 종천이고 규건의 계자는 종종이다. 규곤의 아들은 종화 정종인데 정종은 규건앞으로 출가하였다. 맏손자 종운은 아들이 없어 종천의 아들 제창을 후사로 삼았다. 정종의 아들은 효제다. 종화의 아들은 선제 봉제다. 제창의 아들은 동철 동영 동배이다. 아아! 공은 선비 가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