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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비 병서(幷序) 조선왕조는 유교를 국교로 하여 많은 선비를 길러냈다. 선비들은 국가민족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목숨을 바쳐 분연히 일어섰다. 임진왜란때는 의병이 나라를 구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고 조선 말기에 이르러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 곳곳에서 의병을 일으켜 구국의 대열에 앞장섰다. 불행하게도 경술(1910)년왜적에게 나라를 잃은 이후로 선비들은 혹은 국내에서 혹은 외국에서 끊임없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이 33인의 민족대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선비가 안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유림의 큰 수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까닭으로 3.1운동 직후 유림은 면우 곽종석선생을 중심으로 유림대표 137명이 힘을 규합하여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는 만국평화회의에 우리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든 장서를 보냈다. 왜놈들의 압제가 가혹하던 시절에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것은 목숨을 바칠 결심이 되어 있어야 햇는데 일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분연히 앞장서 서명한 분이 계시니 바로 죽포 박공이다. 공의 휘는 翼熙(익희) 자는 장언 죽포는 그 호이다. 본관은 밀양인데 신라 왕자 밀성대군이 봉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려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