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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호는 票亭, 字는 可一, 諱는 熙善이다. 공은 本性이 온화하고 공손했는데 가정이 어려워 학문에 專念할 수가 없었다. 살림에 힘을 기울이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드디어 살림이 일어나자 “그런대로 살만하니 더 부유해서 무엇하겠는가” 하고 困窮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한 사람을 救濟하여 誠意가 남다르니 사람들이 推仰 하였다. 항상 文房諸具를 구비해 두고, 가난하여 공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다. 또 마을에 아이를 낳닿으면, 그때마다 미역과 쌀을 보내주어 祝賀했고, 喪事를 당한 가정에는 賽事에 필요한 물건을 보내 弔問했으며 춤고 배고픈 過客이 있으면 배 불 리 먹이고 며칠씩이나 재워 보내다 보니 집안에는 항상 손님이 그득하여 마치 옛날 한나라 때 손님 접대로 유명한 孔 北海 融과 같은 風度가 있었다. 늘 일찍이 공부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마을에 서당을 짓고 스승을 맞아 子姪과 고을에 재 주 있는 사람을 가르쳐 학문이 성취하기를 기대했고, 고을 사람을 대함에 신의가 두터웠다. 후인들이 옛 은혜를 잊지 못하여, 서로 의논하고 비석을 세워 그 공적을 드러내었다. 또 많은 선비들이 추모계를 모으니 契帖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200명이나 되었다. 다시 遺塊牌를 세우고, 이어 집을 한채 짓고 農山顆라 縣板을 걸고 追慕하니 은혜와 덕이 있는 사람을 감동시킴과 항상 변치 않는 인간의 本性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공은 1869 년에 나서 1947년에 別世하니 享年79 세였다. 기적비 왼쪽에 있는 송덕비에는 다음과 같은 싯귀가 적혀 있다. 醮漁爲本(초어위본) 勤努當富(근로당부) 感溫如一(감온여일) 浮萍旅裝(부평여장) 接應難分(접응난분) 另圖竪立(영도수립) 농사를 근본으로 부지런히 힘써 부자되었네. 평생 남을 도우며 귀천을 가리지 아니했네. 지나가는 길손들이 정성모아 이 비슬 세웠네. 출처 : 경남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