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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獻陵朝(헌릉조) 때의 徵士(징사)인 호조정랑 증 이조참판 졸당선생 박공은 晚年(만년)에 鳳城(봉성)의 대평에서 은둔하다가 세상을 버리니 江陽(강양)의 鳳基里(봉기리)에 안장하였다. 공은 충숙공 송은선생의 막내 아들이다. 세형인 우당, 인당, 아당공과 함께 일찌기 사봉의 칭찬이 있으니 생을 마치고 돌아가 쉬는 땅 이름이 마침내 서로 적중되는 일은 또한 우연하지 않음이 있다. 공의 후손들이 일찌기 대평에 齋舍(재사)를 두어 鳳山齋(봉산재)로 이름한 것은 대개 옛날 살던 곳임을 기억하고 겸하여 모제의 제구를 간수하던 장소로 삼았다. 원래 두 곳은 산과 강이 가로 막혀서 묘제 때 參祀(참사)를 함이 노고가 많고 불편하다 하여 별도로 한 집을 봉기의 산소 아래에 세우고 재계하고 잠잘 곳을 갖추니 鳳陽齋(봉양재)라 하였다. 이에 봉산과 봉양은 또 함께 서로 호응하면서 고향에 대한 恭順(공순)한 마음과 先塋(선영)에 대한 수호라는 두 가지를 얻었으니 그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라. 예전에 우리 先師(선사)이신 郭先生(곽선생)이 봉산재 기문을 지었을 때 자세히 말하기를 공이 세상에 나아가는 것과 물러나는 것이 봉이 때에 순응하는 것과 같이 했다고 하였으니 그 말씀이 매우 자상하였다. 이제 박씨 제공들이 오히려 봉양의 재라 함으로써 이미 스스로 기문이 있어 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후손 亨在(형재)군이 찾아와 곧 나에게 이 일을 의논함으로 나도 또한 옳은 일이라 여겨 기문을 사양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하니 공은 송은 선생의 가정에 태어나 포은선생의 문하에 종사했으므로 사물을 익히고 글을 읽는 바가 진실로 하나의 의리일 것이다. 그 出仕(출사)에 응해야 한다는 新朝(신조)의 명이 이르자 곧 先後異天(선후이천)의 家訓(가훈)을 실지로 준수했으니 先朝(선조)의 신하로서 節義(절의)를 지키는 것과 後朝(후조)의 신하로 벼슬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뜻이 모두 그 道理(도리)에 있어 진실로 각각 정당하다. 마침내 一言(일언)이 쓰이지 아니하고 謫居(적거)하였다. 돌아와 본성을 찾고 初志(초지)를 이루어 궁벽한 산과 적막한 물가에서 스스로 안주하면서도 원망과 후회가 없었다. 앞에는 일천 길이나 훨훨 날아올라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과 뒤로는 세상을 멀리한 것이니 요컨대 한 봉이 아닐 수 없다. 가히 이상한 것은 아침해가 솟아 올라 좋은 운수가 흥성하였을 때 마치 공과 같이 빛나는 좋은 선비가 마침내 君子(군자)에게 아름답게 보이며 쓰임이 되지 아니함은 어찌된 일인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말에 지위가 덕에 맞지 아니한 자는 반드시 後福(후복)이 있다고 하더니 공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남쪽 변방에 거의 두루 퍼져 사는 것이 어찌 공이 몸소 祿(녹)을 먹지 않고 후일을 기다림이 있음이 아닌가 하노라. 공이 대평에 있을 때 옥산정에다 여덟 그루의 소나무를 손수 심었는데 과연 자손들 가운데 여덟 사람이 와서 印綬(인수)를 걸었다고 한다. 그 정자를 말하는 사람들을 王晋公(왕진공)의 三槐(삼괴)의 고사에 비유하니 그 징험은 거의 비슷하다 할 것이다. 이 齋室(재실)을 짓기는 지나간 乙丑(을축)년의 봄이었는데 형재의 先考(선고)이신 熙廷(희정)공으로부터 그 의논을 倡導(창도)하였고 기강을 세워 措畵(묘화)한 이는 容和(용화), 熙濟(희제)이며 선후의 役事(역사)를 주간한 이는 熙廷(희정), 熙普(희보) 諸氏(제씨)인데 이를 아울러 써서 후일의 참고로 삼게 한다. 신축 서기 1961년 3월 상순 문소(의성) 김황은 삼가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