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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棲齋移建記(봉서재이건기) 水利(수리)와 發電(발전)을 겸한 香江工事(향강공사)는 이 地域(지역) 未曾有(미증유)의 大規模事業(대규모사업)으로 그 水沒地區(수몰지구)로 예정된 곳은 部落(부락)이 撤去(철거)되고 田畓(전답)은 浸水(침수)되며 文化遺產(문화유산)은 發掘調查(발굴조사)되고 移建保存(이건보존)하게 되니 이 故庄(고장)에 世居(세거)한 密城朴氏(밀성박씨)의 鳳棲齋(봉서재)도 水沒地(수몰지)라 移建(이건)하지 않읕 수 없게 되었다. 齋(재)는 처음 密城朴氏(밀성박씨) 八亭公(팔정공)의 追慕所(추모소)로 後孫(후손)이 세운 丙舍(병사)이다. 그러나 그곳이 水沒地區(수몰지구)가 됨에 따라 公(공)의 十二代胄孫(12대주손) 丁濟氏(정제씨)가 父親(부친) 鍾潤公(종윤공)의 命(명)으로 그 從叔(종숙) 元鍾公(원종공)과 一家親族(일가친족)과 協謀(협모)하고 磻溪(반계) 甕店(옹점) 等地(등지)에 있는 十二代祖以下(12대조 이하) 八代祖(8대조)까지의 墓所(묘소)릍 十六代祖(16대조) 杜村公(두촌공)과 十五代祖(15대조) 察訪公(찰방공) 墓所(묘소)가 있는 大並面(대병면) 城里(성리) 山陰(산음)으로 移葬(이장)하고 鳳棲齋(봉서재)도 이곳으로 移建(이건)하게 되었다. 移安(이안)된 五代(5대)의 祖上(조상)은 高麗朝(고려조)에 贈領議政(증영의정) 銀山府院君(은산부원군) 諱(휘) 永均(영균)의 子(자) 贈左議政(증좌의정) 忠肅公(충숙공) 諱(휘) 翊(익)의 第四子(제4자)인 拙堂先生(졸당선생) 諱(휘) 聰(총)의 五代孫(5대손) 諱(휘) 天祐(천우) 字(자) 子受(자수) 號(호) 八亭(팔정)이니 萬曆(만력) 丙子(병자) 進士試(진사시)에 合格(합격)하였다. 天性(천성)이 至孝(지효)하여 母病(모병)에 嘗糞斷指(상분단지)하고 遭艱(조간)에 白虎(백호)가 門前(문전)에 伏死(복사)하니 時人(시인)이 孝感所致(효감소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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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亂(임란)에 與郭(여곽) 忘憂堂(망우당) 趙(조) 大笑軒(대소헌) 諸公(제공)으로 倡義討倭(창의토왜)하고 岳堅山城(악견산성)을 守備(수비)할 때 趙公(조공)이 贈詩曰(증시왈) 崆峒山(공동산) 外生雖樂(외생수락)이나 巡遠城(순원성) 中死無榮(중사무영)이라 하니 殉國精神(순국정신)을 강조함이라. 당시 義士(의사)들의 氣槪(기개)를 볼 수 있다. 綱常(강상)이 人世(인세)의 砥柱(지주)라면 忠孝(충효)는 綱常(강상)의 大本(대본)이라. 이를 實行(실행)하신 公(공)은 어찌 錄原從功(녹원종공)과 陰官贈職(음관증직)이 문제가 되리요. 始葬(시장)은 鳳山(봉산) 龜(구) 磻溪(반계)이고 玄孫(현손) 英標(영표)가 墓碑文(묘비문)을 撰(찬)하였다. 水沒地區(수몰지구)로 一九八五年(1985년) 乙丑(을축) 二月(2월) 大並面(대병면) 城理(성리) 山陰(산음) 先山(선산) 下(하)로 옮겼다. 子(자) 諱(휘)는 昌道(창도) 字(자)는 勉甫(면보) 號(호)는 湫灘(추탄)이니 壬亂(임란)에 討賊有功(토적유공)하여 與(여) 李月沙(이월사) 李漢陰(이한음) 諸賢(제현)으로 同參(동참) 一等功臣(일등공신)하고 特蒙(특몽) 恩典通政(은전통정)하다. 舊墓(구묘) 鳳山(봉산) 甕店(옹점)에 있어 曾孫(증손) 英標(영표)가 墓碑文(묘비문)읕 撰(찬)하였다. 子(자) 諱(휘)는 禴(약) 字(자)는 致中(치중) 號(호)는 華齋(화재)로 受業于(수업우) 蘆坡(노파) 李屹先生(이흘선생) 門(문)하니 文行(문행)이 著於鄉省(저어향성)하였다. 舊墓(구묘)가 甕店(옹점)에 있어 孫(손) 英標(영표)가 墓表文(묘표문)을 撰(찬)하였다. 子(자) 諱(휘) 慶萬(경만) 字(자)는 伯新(백신) 號(호)는 岩旅(암려)니 自幼(자유)로 友愛尤篤(우애우독)하고 課工(과공)이 篤實(독실)하니 手不釋卷(수불석권)하여 文辭(문사)가 著世(저세)하였다. 初葬(초장)이 甕店(옹점)에 있었으나 乙丑(을축) 二月(2월)에 正洞(정동) 先山(선산) 下(하)로 옮기고 竪碑(수비)하니 齊軒(제헌) 金永撤(김영철)이 碑文(비문)을 撰(찬)하였다. 子(자) 諱(휘)는 英標(영표) 字(자)는 俊甫(준보) 號(호)는 慕庵(모암)이니 學行(학생)이 篤實(독실)하고 先代碑文(선대비문)을 述(술)하였다. 처음 墓(묘)가 甕店(옹점) 先兆局内(선조국내)에 있었으나 그 父子(부자) 封塋(봉영)을 正洞(정동) 先山(선산) 下(하)로 同時(동시)에 옮기고 竪碑(수비)하니 義城(의성) 金禹東(김우동)이 비문을 撰(찬)하였다. 鳳棲齋(봉서재)는 歲久頹落(세구퇴락)하여 옮기지 못하고 五楹(오영) 四架(사가)로 城里(성리) 先山(선산) 下(하)에 新築(신축)하니 岳堅(악견)이 主山(주산)이요 錦城(금성)과 墟堀(허굴)은 案山(안산)과 朝山(조산)이 되며 左右(좌우) 諸山(제산)이 羅列拱楫(나열공집)하고 앞으로 大野(대야)가 肥沃(비옥)하니 그 景觀(경관)이 秀麗(수려)하도다. 이제 이 丙舍(병사)는 八亭公(팔정공)만의 追慕所(추모소)가 아니라 水沒(수몰)로 因(인)하여 同時(동시)에 移葬(이장)한 五位(5위) 祖孫(조손)의 追慕所(추모소)가 될 것이다. 원하노니 朴氏(박씨) 諸位(제위)는 더욱 誠心(성심)을 다하여 香火(향화) 千秋萬代(천추만대) 계속할진저. 其(기) 冑孫(주손) 丁號氏(정호씨)가 請余記文(청여기문)이어늘 不文(불문)으로 사양치 못하고 改築顚末(개축전말)읕 대강 기록하는 바이다. 一九八七年(1987년) 六月(6월) 十五日(15일) 前(전) 東國大學校(동국대학교) 大學院長(대학원장) 文學博士(문학박사) 現(현) 慶南道(경남도) 文化財委員(문화재위원) 昌原后人(창원후인) 仲焕(중환) 謹記(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