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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에 재실을 두는 것은 오래된 유래라, 혹은 묘소 곁에 세우고 혹은 자손 거주 하는 곳에 세우니 묘역을 수호하고 바라보는 것은 형편에 따름이요, 사세는 비록 같지 아니하나 그 추모하는 심정은 한가지라. 합천읍 북쪽 백여리에 숭산이 있고 숭산 남쪽에 두산마을이 있으니 곧 밀성박시의 여러대로 거주하는 곳이라. 마을에 박씨가 처음으로 있게된 것은 회산공 부터이니 공이 조선조 말엽에 당시 사태가 복잡함으로 보고 삼가 송지에서 가솔을 이끌고 두무산중에 숨어서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고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글 읽으며 스스로 그 뜻을 즐겨하니 사람들이 숨은 군자라 일컬으며 장차 사회에 크게 쓰이리라 기대하였더니 불행히 단명하여 37세로 별세하니 사방에서 문상온 사람마다 애석하고 통탄하지 않은 이 없었다. 점꼴 병자원에 안장하니 집과의 거리가 몇리이다. 지금 공이 돌아가신 지 150년인데 산하에 거주하는 자손들이 호수는 적고 힘이 모자라서 아직 재실을 세우지 못하였더니 1985년 봄에 종중 의논이 확정되어 이르기를 이 일을 뒤로 미룰 수 없다 하고 종재를 털어 마을에 있는 고가 하나를 구입하여 대략 보수하고 해마다 묘사때 정성드리는 곳을 삼으니 이제야 위선하는 체제가 비로소 갖추었고 또한 회산공의 끼친 업적이 장구하리라. 박씨 재실이 묘소 곁이 아니고 여기에 세운 것은 내왕하는 거리가 멀어서 수호하는데 불편한 연고라. 어느날 공의 5세손 선제, 순제, 원제, 정제가 문중 어른들의 명령으로 공의 방손 준재씨가 지은 비문을 받들고 중동서원에 와서 재실 이름과 기문을 청하므로 내가 그 성의에 감동되었다. 어찌 글하지 못함으로 사양하리요. 마침내 경회재라 이름하니 회산공이 끼친 은혜를 사모함이라. 증자님이 말씀하시기를 초상때 예절을 다하고 제사때 정성을 다하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워진다 하셨으니, 무릇 위선하는 도리는 덕을 닦는 것이 근본이므로 여기에 모이는 박씨들은 오늘의 거사로 할 일을 다하였다 하지말고 더욱 그 뜻을 돈독히 하여 낮이나 밤이나 해태함이 없이 그 시를 외우고 그 글을 읽고 그 뜻을 이어서 그 사업을 성사시켜 회산공의 당시 모범을 막힘없이 끌고가야 바야흐로 위선하는 도리를 다해서 영원히 수호할 것이요. 그러하지 못하면 해마다 난간과 헌함을 꾸미고 달마다 문과 담장을 고쳐도 무엇이 유익하리요. 원하노니 여러분들은 힘쓰시오. 이것으로 돌려주면서 경회재 기문을 하놀. 1975년 4월 소만절에 합천 이상학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