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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嘉縣(삼가현) 北(북)쪽 講德山(강덕산) 아래 마을이 있으니 이름을 橋項洞(교항동)이라 하는데 山川(산천)이 요조하고 유수하며 정벽하여 德(덕)있는 사람들이 이 世上(세상)의 榮利(영리)를 잊고 養德(양덕)할 만한 곳이다. 옛적 密陽朴氏(밀양박씨) 拙堂先生(졸당선생)의 後孫(후손)에 中樞副使(중추부사)를 지낸 講齋(강재) 諱(휘) 天生(천생)과 그 분의 아들 諱(휘) 起善公(기선공)은 文學(문학)과 行誼(행의)로 著名(저명)했는데 燕山朝(연산조)에 政治(정치)의 紊亂(문란)으로 벼슬에 뜻이 없어서 父子(부자) 두 분이 이곳에 숨어서 淸高(청고)한 節義(절의)를 지키며 耕讀(경독)하여 禮儀(예의)를 지키며 勤勉(근면)하여 風俗(풍속)이 一變(일변)하여 孝友(효우)하고 敦睦(돈목)하며 辭讓心(사양심)을 알게 되었다. 朴氏(박씨) 數(수)가 점점 늘어서 數百戶(수백호)가 되었다. 祖先(조선)이 移徙(이사)왔고 그 後孫(후손)들이 살면서 祖先(조선)을 追慕(추모)할 齋舍(재사)를 다들 가졌는데 우리들만이 없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하고 議論(의논)을 定(정)하고 合力(합력)하여 마을 옆에 齋室(재실)을 짓고 德陽齋(덕양재)라 이름 했는데 二公(이공)을 追慕(추모)함이였다. 甲寅年(갑인년)에 그 後孫(후손) 鍾璨(종찬)과 仁和氏(인화씨)가 나를 찾아와서 우리 先祖(선조)들도 齋舍(재사)를 지을 뜻은 있었으나 只今(지금)까지 實踐(실천)하지 못한 것은 자네도 잘아는 일이 아닌가. 偉大(위대)한 祖上(조상)을 다 顯彰(현창)하지 못하고 若干(약간)의 物力(물력)으로 工事(공사)를 하니 齋舍(재사)가 特出(특출)하지 않으나 記文(기문)은 없을 수 없으니 자네가 記文(기문)은 지어주기를 바라네. 내가 글재주가 없어서 辭讓(사양)했으나 끝내 拒絶(거절)할 수 없었다. 朴氏(박씨)의 貫鄕(관향)은 密陽(밀양)인데 橋項(교항) 居住(거주)하는 朴氏(박씨)는 名利(명리)를 求(구)하지 않고 農事(농사)지으면서 修身齊家(수신제가)하고 살아왔는데 이것은 二公(이공)의 遺訓(유훈)을 지킨 것이다. 只今(지금) 熙碩君(희석군)이 海外(해외)에 居住(거주)하면서 齋室(재실)을 建立(건립)한다는 消息(소식)을 듣고 感興(감흥)하여 送金(송금)하니 참으로 可賞(가상)할 일이다. 願(원)컨대 朴氏(박씨)들은 祖先(조선)의 德(덕)을 저버리지 말고 德業(덕업)을 더욱 밝히고 父母(부모)를 孝養(효양)하여 二公(이공)의 바라는 뜻에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에 記(기)하노라. 甲寅(갑인) 孟春(맹춘) 長興(장흥) 馬鍾漢(마종한) 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