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page


18page

다. 고을안의 선비들이 來庵 鄭仁弘(내암 정인홍)을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사방에 격문을 띄웠다. 경(敬)과 의(義)를 주지로 하는 실천유학의 거장 남명 조식의 고제(高弟)인 정인홍은 장령벼슬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후진양성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동문인 곽율 김면등과 뜻을 같이 하고 합천을 비롯하여 초계 삼가 거창 안음 함양 고령 성주 등 이웃 고을에 통문을 보내자 그의 문인인 박이장(朴而章) 하혼(河渾) 권양(權瀁) 조응인(曺應仁) 문홍도(文弘道)등을 핵심으로 본군 의병만해도 1천6백여명의 장정이 모여들었다. 관찰사 김수(金晬)는 합천 삼가 초계 고령 성주등 5읍의 군대를 그에게 소속시켜 주었고 전 첨사 손인갑(孫仁甲)을 보내 중위장(中衛將)으로 삼도록 했다. 후에 고령선비 김응성(金應聖)이 1천여명의 군사를 모아 휘하(麾下)에 들어왔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 의해 김면과 더불어 의병대장의 직책을 부여받았으며 의령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영남 3대의병대장의 일컬음을 듣게되었다. 초계와 삼가에서도 의거를 했으니 초계에서는 5월 초순에 김치원(全致遠) 이대기(李大期) 등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고 삼가에서는 윤탁.선(尹鐸.銑) 종형제와 박사제(朴思齊)등이 앞장서서 모병을 하고 군량을 모았다. 5월 하순에는 정인홍 의병군은 3천여 정예군사를 헤아리는 전투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의령의 곽재우 거창의 김면 초계의 김치원 이대기 고령의 김응성 성주 일면을 지키는 문려(文勵), 이홍우(李弘宇)등 의병장들과 연계하면서 우도 일대의 토적작전을 총괄하여 수행하게되었다. 합천의병은 내고장만 지킨다는 방어위주의 태세에서 한걸음 나아가 험준한 우도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이땅에서 침략군을 물리쳐야 한다는 적극적인고 전술적 차원의 작전을 전개하였다. 첫째는 적군의 생명선인 낙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둘째는 곡창지대인 호남진출을 저지함으로써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군의 사기를 꺾으며 격멸하는데 주력했다. 아울러 전국의병 창기의 효시가 되고 패퇴만을 거듭하던 관군의 반격태세를 작추게 하는 동시 명나라 지원군이 도래할수있는 시간을 확보하여 전세를 역전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주요 전투를 들어보면 무계진전투 사원동 복병작전 초계전투 현풍전투 안언역전투 진주성 부원작전 반년에 걸친 성주성 수복작전 나아가 개령의 7번대 본진 공위((攻圍)작전등 수많은 싸움터에서 막강한 왜군을 맞아 오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