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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0월31일 화요일 8 (제130호) 종합 ‘정신건강의 날’은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 인 인식과 편견으로 제때 치료받지 못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1968년 대한신경정신의 학회에서 4월 4일로 제정해 기념해 왔으나, 올해 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 스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10월 10 일을법정기념일로지정했다. 「2016년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에 따르 면 우리나라는 정신질환 평생유병률이 25.4 %(男 28.8%, 女 21.9%)로 성인 4명 중 1명이 평생 한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하고 있으며, 국민의 53.4%만이 자신의 정신건강 에 대해 긍정적이라 생각한다’고 나타났다. 또 우리나라는 14년째 OECD 국가 중 자살 률 1위로 10대,20대,3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통계는 우리사회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현실이반영된것으로진단된 다. 1년 간의 유병률은 11.9%(男 12.2%, 女 11 .5%)로, 지난 1년 간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 한 사람은 470만 명으로 추산되며 정신건강 문제로 전문가와 상의한 적이 있는 경우가 전체의 9.6%로 ’11년의 7.0%에 비해 약 2.6% 증가하였으나, 정신건강서비스 이용은 미국 43.1%(’15년), 캐나다 46.5%(’14년), 호주 3 4.9%(’09년)에 비해 낮은 수준으로 나타났 다. 이에 각 지역에서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 가운데대구엑스코에서도대구시와교육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구경북지부학회(회 장 박용진)가 공동주최한 2017 정신건강박 람회가 ‘마음나누기 행복더하기’라는 슬로 건으로개최되었다. 행사를 주최한 박용진 회장은 인사말에서 이번 박람회가 체험과 상담을 통해 정신건강 에 대 한 다 양 한 정 보 와 사 회 적 편 견 을 없 앨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 다”며 “인간은 다른 사람 과 소통하고 화해와 먼저 서로 화합하고 공감하여 야한다.”고말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박용 진 회장은 (사)신라숭덕 전릉참봉협의회 박윤도 이사장의 아들이다. 경북 대학교 의과대학 석·박사 과정을 수료한 박 회장은 알바니 의과대학병원, 존 슨홉킨스대학병원, 노스 캐롤리나 대학병원, 케네디 크리거 연구소, 베이뷰 메디컬 센타, 피츠버그 대학병원 정 신과, 예일의과대학병원 등 미국대학병원의 연수 및 견학을 통해 세계적인 정신과 전문 의로성장지역주민의복지를위해적극적인 활동을하고있다. 정신건강의학과의사와함께하는2017정신건 강박람회 ‘마음나누기행복더하기’주제로19일부터20일까지대구엑스코에서열려 박윤도 이사장이 부인과 함께 행사장을 방문 아들 부부를 격려하고 있 다. “참된수행자가나올때부처님법은이어지는것,부 처님 믿는 모두 승보,승보는 화합 대중이다.수행자들 이 곳 곳 에 서 나 올 때 불 교 발 전 할 수 있 을 것 , 죽 기 전 에한생각어떻게챙기고가느냐그것이중요” ‘원 수 갚 지 말 고 은 혜 는 갚 아 라 .’ 조 계 종 원 로 의 원 원경스님이 주석하는 평택 만기사 천왕문에 적혀 있 는 문구다. 중생들의 생각으로는 은혜는 쉽게 잊히고, 원수는 쉽게 잊기 어렵다.누가 잘 해준 기억은 오래가 지 않아도 잘못했던 일은 두고두고 남기 마련이다. 그 래서일까. 짧은 문구가 가슴에 남았다. “특별히 말할 것이 있나요 차나 한 잔 하시죠.” 지난 7일 원로의원 원경스님을평택만기사에서만났다. 평생을묵묵히수행자의길을걸어온원경스님. 원경스님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비운의 혁명가,이정 박헌영 선생의 아들로 더 잘 알려 져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전 후 근·현대사가 순탄치 않았던 것처럼 원경스님의 삶 역시 순탄치 않았다. 반 공을 국시로 삼고,‘공산주의’라는 말이 금기였던 시절 이었다. 원경스님은 입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채 살아야만 했다. 가슴 아픈 가족사는 수행의 원동력 이됐다. 원경스님의 일생을 관통하는 단어는 바로 ‘한(恨)’ 이다.참회기도와 하루 3000배씩,1년에 100만 배를 올 리며 마음을 다스렸다. 가슴 깊이 사무쳐 도무지 사라 지지 않을 것 같았던 한이 차츰 옅어져 갔다.어지럽던 마음도 안정됐다. ‘원수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는 문구는 만기사를 찾아오는 이들을 향한 원경스님의 당부이자 스스로를 위한 다짐이었다. 스님의 좌우명 이기도하다. “죄를 지은 일도 없는데 평생을 두려움과 압박 속에 서 살았습니다. 누구(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세상과 등진 채 농사지으며, 수행하며 그 렇게 살았죠.수행과 농사를 벗 삼아 10년을 지내고 나 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부처님 품에서 시줏밥을 먹 으며 살아남았죠. 아버지는 아버지의 운명이, 내게는 내운명이있는것입니다.” 수행으로원한이사라지자선친에대한자료를찾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1986년 당시 변호사였던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참여했다. 직접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학자들과 함께 박헌영 선 생에 대한 자료도 모았다. 고종사촌 형이자 선친과 함 께 했던 동지, 어린 시절 자신을 돌봐주던 한산스님과 의약속이기도했다.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선친과 관련된 자료를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스님 에게는 그 일이 곧 수행이었다.그렇게 10여 년간 모은 자료를 정리해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 다. 이후 전집을 바탕으로 박헌영 선생의 진면목을 대 중들에게 알리기 위해 6권으로 된 <만화 박헌영> 제 작, 발간에 앞장섰다. 앞으로 해방정국과 월북 이후의 삶을담아추가로3권을발간할예정이다. 스님에게 불자 인구 감소 문제와 불교 발전에 대한 방도를 청했다. 원경스님의 답은 짧고 명확했다. “한 사람의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부처님 법은 이어지는 것”이답이었다.스님은“불자인구가300만 명이 감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숫자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한 사람이라도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모범이 나올 때, 참 도인이 나올 때 불교는 바뀔 것이라고 믿는다” 고 역설했다. 기복불교를 비판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스님은 다른 입장을 밝혔다. “부처님 믿는 것 자체가 기복”이라는말이었다. 스님이 바라는 세상은 “남을 인정하고 베풀 수 있는 사회”다.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한과 세상의 차디찬 시 선을 온몸으로 겪으며 평생을 살아온 스님이기에 다 른 사람을 인정하고 함께 화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 요하다는 말이다.최근 적폐청산 주장 등 종단 내 혼란 스러운상황에대해서도조언을아끼질않았다. “중은 남의 허물을 건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안아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어른 스님들로 부터 배운 것입니다. 어른 스님들은 항상 상대를 이해 하고, 용서하고, 감싸주라고 당부하셨습니다. 부처님 을 믿는 모두가 승보입니다. 승보는 화합 대중입니다. 스스로가 거름이 될 때 화합할 수 있습니다.화해와 화 합은스스로를내려놓을때가능합니다.” 후학들과 불자들을 위해서도 “끊임없는 수행”을 당 부했다. 원경스님은 “누구 보라고 수행하는 것이 아니 다. 견성오도(見性悟道)했다고 수행은 끝이 아니다” 며 “죽을 때까지 수행하고 구도해야 한다. 죽기 전에 한 생각 어떻게 챙기고 가느냐,그것이 중요하다.수행 자들이 곳곳에서 나올 때 불교가 발전할 수 있을 것” 이라고당부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해원탑으로 향했다.개인적인 원한 을 풀 기 위 해 , 선 친 과 함 께 했 던 동 지 들 을 위 해 원 경 스 님은 만기사 경내 한 편에 ‘해원탑(解寃塔)’을 세웠다. <만화 박헌영>이 추가 작업이 완료되면 <박헌영 전 집>과 함께 탑에 봉안할 예정이다. 박헌영 선생에 대 한 재평가가 이뤄질 때 우리사회 이념갈등도 해소될 수있다는게스님의생각이다.원경스님은“남과북이 분단된 상황이다. 이념 갈등은 남북이 통일된 이후에 도 계속 지속될 것”이라며 “세대가 바뀌고 새로운 생 각들이나와야해결될일”이라고밝혔다. 원경스님은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이정 박헌영 선생의 혈육이다. 박헌영 선생이 월북하기 전인 1941 년, 두 번째 부인 정순년 씨가 낳은 아들이다. 박헌영 선생은 조선공산당 최고지도자였다. 1946년 남로당 창당 후 미군정에 쫓겨 월북한 뒤 내각 부총리 겸 외무 장관,조선노동당부위원장에올랐지만6·25전쟁직후 인 미국의 스파이라는 죄목 등으로 붙잡혀 처형됐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임에도 남과 북 모두에게 제대 로평가받지못하고있다. 박헌영선생으로인해원경스님의삶도순탄치않았 다. 부친이 월북한 이후 어머니와도 헤어진 원경스님 은 고종사촌 형이자 박헌영 선생의 동지였던 한산스 님을 만나 불가의 인연을 맺게 됐다.해방 전후 혼란했 던 격랑의 시기 원경스님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원경스님은 한산스님과 함께 지리산 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만 나산생활을시작하게됐다. 전쟁이 끝나고 1958년 한산스님으로부터 아버지의 행적과죽음을처음으로전해듣고는충격에빠졌다. 다시 절로 돌아온 스님은 가슴 아픈 가족사를 이겨 내고 정진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과 전쟁의 경험은 더욱 치열하게 수행하고 정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 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제방선원 에서 참선 수행하며 매진해왔다. 하지만 그 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출생 내력은 스 님으로어디를가나오래머물지못했다. 1973년 여주 흥왕사 주지를 맡은 이후 농사와 수행 에만 전념하며 묵묵히 수행자의 길을 걸어왔다. 원한 이 가라앉고 난 뒤에는 박헌영 선생을 재평가하기 위 해 작업에도 착수했다. 1993년부터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와 함께 박헌영에 관한 기록과 사진 자료를 모아 2004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발간했다. 또 2010년 격 동의 시대를 살아온 현대사를 기록한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출간하기도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 사회복지과를 수료한 이후 사회 복지에 관심을 갖고 자비를 실천하기도 했으며, 경기 도 지방경찰청 경승 등을 역임하며 지역 포교 활성화 에 앞장서기도 했다. 지난 2014년 원로의원에 선출된 이후 남은 생을 종단과 종도를 위해 활동하겠다는 원 력을세우고평택만기사에머물고있다. 원경스님은 송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0년 용화 사에서 사미계, 1963년 범어사에서 구족계를 수지했 다. 1960년 용화선원에서 수선 안거한 이래 제방선원 에서 참선 수행했다.제10대 중앙종회의원,흥왕사,청 룡사, 신륵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4년 4월 원 로의원에 선출됐으며, 지난 2015년 1월 종단 최고 법 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현재 평택 만기사 주지 를 맡 고 있 다 .[자료제공불교신문평택=엄태규기자 사진김형주기자] “원수는갚지말고은혜는갚아라” [염화실에서법을청하다] 뱚종친탐방 원로의원 원경스님(속명 박병삼) 원로의원 원경스님은 “한 사람의 참된 수행자가 나올 때 부처님 법은 이어지는 것”이라며 “부처님을 믿는 모두가 승보이며, 승 보는 화합 대중이다. 스스로가 거름이 될 때 화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평택 만기사 한 편에 조성된 이정 박헌영 선생 해원탑을 참배하 고있는원경스님. 이정선생61주기추모법회에참석분들에게인사말을하고 있는 원경스님 ■원경스님과이정박헌영선생순탄치 않은삶…수행자의길묵묵히걸으며극복 ■원경스님은븣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