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age

2017년10월31일 화요일 7 (제130호) 특집 △ 사암 박순(思庵 朴淳,1523 ~1589) 사암 박순(思庵 朴淳,1523~15 89) 선생은 명종 8년(1553)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으 로 급제한 이래 관도(官途)에 올라 선조 5년(1572)부터 전후 14년 동안이나 정승(政丞)을 지 낸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대재상(大宰相)이다. 사암선생은 숙부 눌재공(訥 齋公)에서 친부(親父) 육봉공 (六峯公)으로 이어지는 강직 근 엄한 가풍(家風)을 계승하고 눌 재(訥齋) 선생이 선도(先導) 함 양(涵養)한 사류(士類)의 불퇴 전(不退轉)의사암 정신(精神)을 복응(服膺)하여 평생을 절조 (節操)있고 정대(正大)하게 살아가는 일대(一代)의 사표(師 表)가되기에부끄러움이없었다. 선조 임금은 사암선생의 인품을 「松筠節操 水月精神, 송균절 조 수월정신」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소나무와 대나무의 곧은 절조에 맑은 물과 밝은 달 같은 깨끗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뜻이 었으리라. 한 신하에게 바치는 찬사로는 대단한 내용이다. 그만 큼 지절이 높았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뜻이었다. 희대 의 정치가 백사 이항복은 사암의 시장(諡狀)에서 “옛말에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다고 했는데 아마도 공을 두고 하는 말 이다”라고말하여위대한그의용기를찬양했다. 명종 말년에 외척(外戚)으로 영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횡포 (橫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윤원형을 사암선생은 생명의 위 험을 무릅쓰고 장문의 장계(狀啓)를 올려 탄핵하였고, 그 일이 발단이 되어 윤원형은 마침내 권좌(權座)에서 밀려나가기에 이 르렀다. 숙부인 눌재공이 ‘신비복위소(愼妃復位疏)’를 올려 훈구파 (勳舊派)의 포학무도(暴虐無道)함을 성토한 일을 연상(聯想) 하게한다. 선조조에는 선생은 현능(賢能)한 인재를 조정에 추거(推擧) 하는데 힘을 기울였다.율곡 이이(栗谷李珥)와 우계 성혼(牛溪 成渾)은 선생이 추거한 인물들이고 율곡과는 특히 의기가 투합 (投合)하여 국정을 바로 이끌어가기 위해 흉금(胸襟)을 털어 놓고 숙의(熟議)하기도 하였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선생 에게는 장배(長輩)였으나 조정에서는 동열(同列)이었다. 선생 은 퇴계의 학덕(學德)을 존경하여 겸허하게 문진(問津)하기를 서슴치않았다. 선조 초년에 선생이 양관대제학에 있을 때 자신보다 학문도 뛰어나고 연륜이 높은 이황을 자신의 아래(提學)에 둔다는 것 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문형(文衡)을 퇴계에게 이 수(移授)할 것을 청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져 한 때 문형이 퇴계 에게로옮겨졌다.그후이일은미담으로전해지게되었다. 당대의 제일 인물로 이조와 예조판서를 거쳐 양관대제학과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내면서 청백리로 이름을 떨치고 시 단의종주,당나라풍의시를복원한시인으로문학과학문에깊 은 조예까지 인정받아 임금은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 다. 시문(詩文)에 밝아 많은 후학들에게 추앙 받았으나 선생은 후사(後嗣)가 없었던 데다 서세(逝世)후 3년째 되던 해에 임진 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그의 시문은 정리(整理)간행될 기회 를 잃고 그 대부분이 산실(散失)되는 액운(厄運)을 겪을 수밖 에없었다. 선생 사후 거의 60년이 지난 인조 24년(1646)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외손(外孫)들이 산재(散在)해 있는 유문(遺文)을 수합 (收合)하여 사암집(思庵集)의 초인본(初印本)을 간행 하였고, 그후중간을보아부록의문집이다소간추가되었다. △육류정(六柳亭)박지효(朴之孝,1553~1641) 선생의 휘는 지효(之孝)이고 자는 자경(子敬)으로 호는 육류 정(六柳亭)이다. 만호(萬戶)를 지낸 송계공(松溪, 휘 대수)과 숙부인 광산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1553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 어났다. 어려서부터 풍모가 준수하며 지혜가 영민 하여서 고봉 (高峯) 기대승(奇大升)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여 문사 (文詞)가 맑고 필획(筆畵)이 굳세어 능히 과제(科第)에 입격할 수 있음에도 응시하지 않았으며, 좌랑(佐郞) 유사경(柳思敬), 창랑(滄浪) 임탁(林 領), 한호(閑好) 임련(林 撈),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와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며 호남의 명문학 파의중추학자로성장하였다 선생은 유일(遺逸-시험을 보지 않고 벼슬함)로 천거(薦擧) 받아 장예원(掌隷院) 사평(司評), 사복시정, 사헌부감찰지평 (司憲府監察持平)으로 불렀으나나가지않았다. 유사(遺事)에 의하면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창궐하여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남평현감 한순(韓楯)이 적에게 함락되자 해광 (海狂) 송제민(宋齊民),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음성인) 등 제공(諸公)이 송계 박장(松溪 朴丈, 大壽)에게 청하여 그의 아들 전(前) 감찰(監察) 지효(之孝)로서 방백(方伯)에게 교대 로 천거하여 권도(權道,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로 고을 일을 맡게 하였다. 공이 의리상 사 양할 수 없어 부임하니 그날로 실직(實職)에 올랐는데 방백(方 伯)이 이미 계청(啓請)했던 것이었다.」라고 전하고 있어 임진 왜란에활약상을엿보고있다. 실제로 고경명(高敬命)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징발하던 중 선 생에게 노모가 살아계심을 알고 있는 고경명의 권유로 고향에 남았으나 전라도 남평현이 왜적의 위협을 받자 목사의 요청에 의하여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700여명을 이끌고 지석강에 복병 하여 왜적을 요격하여 수 백명을 죽이고 왜군 포로로 끌려간 조 선인 300명을 구출한 것이다 이 공로를 나주목사가 조정에 장계 를 올려서 벼슬을 주려고 불렀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육류정(六 柳亭)을 세우고 정각부근에 여섯 그루의 수양버들을 심고 선생 의아호를육류정이라했다. 1627년(인조 5) 후금이 북방을 침입하자 사계 김장생선생과 같이 근왕의병(勤王義兵)을 일으켜 북상하였으나 전쟁에 미치 지 아니하고 화해되어 고향에 돌아와 육류정에 몸담고 학문과 도의실천에만전념해전라도사림의표상이요종장이되었다. 선생이 육류정에 계실 때 어느 겨울 수수대가 났는데 글씨체 가 드러나게 벌레가 갉아먹어 이를 확인해보니 향일고충(向日 孤忠, 왕을 향한 외로운 충성)이라는 네글자가 드러나 선생의 충절을곤충도알아보니가히짐작할만하다.이는현재종손이 보관하고있다. △습독공박지견(朴枝堅,1481~1563) 공(公)의 휘(諱)는 지견(枝堅)이고 초휘는 성견(成堅) 호 (號)는 안락재(安樂齋)로 파은공 휘 수기의 셋째 아들이고 어 머니는함창김씨이다. 율곡의문인으로중봉조헌,고봉기대승,서하당김성원선생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을 넓히었다. 조산대부 천문 예 습독(天文隸 習讀)을 지내다가 심정,남곤 등 훈구파의 종신 들이 파벌을 만들어 도의정치를 표방하고 유교 본연의 도덕성 을 회복하려는 사림파 학자들을 죽이고 핍박 유배시킬 참변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자 관직을 버리고 부친이 있는 장수로 낙향 하였다. 선생께서는 장수현 임남면(현 계남면) 화산마을에 안락재 (安樂齋)를 세우고 스스로 호를 지어 안락재(安樂齋)라 하고 시우들과더불어도의를강의하고연마하며후학들에게배움의 문을 열어주어 인재를 길러내는데 정렬을 쏟았다 선생은 관직 에 있으면서는 충성을 다했으며 혼미한 기미가 보이자 관직을 버리고 산수간으로 은거 하였으니 세상이 윤회하는 것을 짐작 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구별하여 달인의 처세로서 부끄 러움이 없었다. 여생을 안락재에서 후학양성에 매진하다 명종 계해년(1563년)84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육류정(六柳亭)박지효(朴之孝,1553~1641) 선생의 휘는 지효(之孝)이고 자는 자경(子敬)으로 호는 육류 정(六柳亭)이다. 만호(萬戶)를 지낸 송계공(松溪, 휘 대수)과 숙부인 광산김씨 사이에 장남으로 1553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 어났다. 어려서부터 풍모가 준수하며 지혜가 영민 하여서 고봉 (高峯) 기대승(奇大升)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여 문사 (文 詞 )가 맑 고 필 획 (筆 壯)이 굳세어 능히 과제(科第)에 입격할 수 있음에도 응시하지 않았으며, 좌랑(佐郞) 유사경(柳思敬), 창랑(滄浪) 임탁(林 領), 한호(閑好) 임련(林 撈),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와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며 호남의 명문학 파의중추학자로성장하였다 선생은 유일(遺逸-시험을 보지 않고 벼슬함)로 천거(薦擧) 받아 장예원(掌隷院) 사평(司評), 사복시정, 사헌부감찰지평 (司憲府監察持平)으로 불렀으나나가지않았다. 유사(遺事)에 의하면 「임진년 여름에 왜구가 창궐하여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남평현감 한순(韓楯)이 적에게 함락되자 해광 (海狂) 송제민(宋齊民),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 음성인) 등 제공(諸公)이 송계 박장(松溪 朴丈, 大壽)에게 청하여 그의 아들 전(前) 감찰(監察) 지효(之孝)로서 방백(方伯)에게 교대 로 천거하여 권도(權道,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로 고을 일을 맡게 하였다. 공이 의리상 사 양할 수 없어 부임하니 그날로 실직(實職)에 올랐는데 방백(方 伯)이 이미 계청(啓請)했던 것이었다.」라고 전하고 있어 임진 왜란에활약상을엿보고있다. 실제로 고경명(高敬命)선생과 의병을 일으켜 징발하던 중 선 생에게 노모가 살아계심을 알고 있는 고경명의 권유로 고향에 남았으나 전라도 남평현이 왜적의 위협을 받자 목사의 요청에 의하여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700여명을 이끌고 지석강에 복병 하여 왜적을 요격하여 수 백명을 죽이고 왜군 포로로 끌려간 조 선인 300명을 구출한 것이다 이 공로를 나주목사가 조정에 장계 를 올려서 벼슬을 주려고 불렀으나 사양하고 고향에 육류정(六 柳亭)을 세우고 정각부근에 여섯 그루의 수양버들을 심고 선생 의아호를육류정이라했다. 1627년(인조 5) 후금이 북방을 침입하자 사계 김장생선생과 같이 근왕의병(勤王義兵)을 일으켜 북상하였으나 전쟁에 미치 지 아니하고 화해되어 고향에 돌아와 육류정에 몸담고 학문과 도의실천에만전념해전라도사림의표상이요종장이되었다. 박지효 선생은 말년에 선조의 채취가 남아있는 장수 땅으로 이주해서파은공이지은자락정에서노닐며선혈들의가르침을 살피고 안재 박지견 선생이 이룩한 안락재에 유하면서 선친들 의덕망을흠모하였다고전한다. 뱚▶6면에서계속 사암 박순선생영정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반드시 그 직책(職責)을 주게 되니 그직책이아니면아람이될수없다.부모에게마땅히효도하며 임금에게 마땅히 충성하며 부부간에 마땅히 분별하며 형제간 에 마땅히 우애하며 벗에게 마땅히 믿음 있게 하며 친척에게 마 땅히화목할지니이것이인생의직책이다. 만물(萬物) 중에 귀한 것은 사람이니 무엇 때문인가? 인도 (人道) 학문(學問)이 있음이니 학문은 마땅히 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수양(修養) 할 뿐이니 학문(學問)에 어둡고 인도 (人道)에 벗어나면 마음 바닥에 띠가 막히고 식견(識見)이 미 망 ( 迷 茫 )하 여 안 개 속 햇 빛 같 아 밝 히 고 저 하 나 되 지 않 는 다 . 이같이하여만물에귀할수있겠는가?비록인형(人形)이있으 나 어찌 금수(禽獸)와 다르랴 모름지기 너희들은 학문에 힘쓰 고 인륜(人倫)에 밝게 하며 부지런하고 의젓하며 수양하고 뜻 을 세워 시속(時俗)에서 벗어나면 현인(賢人)되기 어렵지않으 며성인(聖人)되기어렵지않으리라 대개 중인(衆人)과 성인이 그 본성은 같으니 옛 허물을 버려 타고난 성품을 회복하고개연(慨然)히 분기(奮起)하여 이뜻을 확수(確守)하여 조금도 더하지 않고 모든 선(善)에 족(足)하게 되면중인(衆人)이성인(聖人)에자기(自欺)함이이것이다. 맹자(孟子)가 말씀하시되 뷺순(舜)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 가뷻하시고 안연(顔淵)이 말씀하시되 뷺순(舜)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노력하는 이는 이같이 된다뷻 하시며 성한(成?)이 말 하기를 뷺저도 장부(丈夫)이며 나도 장부(丈夫)인데 내가 왜 저 를두려워하리요뷻하니이는허물을고쳐뜻을세우는것을말함 이다. 만약 뜻이 성독(誠篤)하지 못하여 포기해 버리고 그대로 지나쳐고친듯마는듯하고오늘내일미루면세월이유유하여 죽음에임하여슬퍼한들무엇하리요원(願)컨대학도들은생각 을여기에둘지어다. △임금께충성(忠誠)하는것 임금 섬기기를 어버이 섬기듯 하여 어버이 섬기는 정성으로 임금을 섬기며 어버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임금을 사랑하면 저 절로 임금께 향(向)하는 충성이 있으리라 옛 말에 이르기를 충 신(忠臣)을 효자(孝子)의 문(門)에서 구한다 하니 이것이 이른 바 충효(忠孝)가 마찬가지이니능(能)히 그 어버이를 사랑하는 이는능히그임금을사랑하는것이다. 임금을 덕으로 인도하며 직언(直言)으로 항의(抗議)하여 마 땅히 삼사(三事)로 국사(國事)에 전무(專務)하면 인신(人臣) 의 도(道)를 다 함이니 삼사란 무엇인가?청(淸)과 신(愼)과 근 (勤)이다.또 말하기를 「도끼와 자귀를 맞아도 바르게 간(諫)하 며 솥과 가마에 삶아도 할 말을 다 한다」하니 생(生)과 사(死) 에 곧 게 하 는 것 을 충 신 ( 忠 臣 )아 라 이 르 니 한 갓 옥 백 (玉 帛 ) 만 을 탐하여 신하(臣下)의 자리만 꾀하고 공교한 말과 아첨하는 얼굴로 군부(君父)에게 아뢰어 국정(國政)을 어지럽히며 왕장 (王章)을 훼손(毁損)하면 하늘을 속일 수 없고 천죄(天罪)을 도피(逃避)하기 어려워 천추(千秋) 아래에 사필(史筆)에 전 (傳)하여 아무는 충성스러웠고, 아무는 곧았으며 아무는 간사 하였고 아무는 굽었다 하리니 어찌 엄(嚴)하지 않으며 어찌 두 렵지않으랴 △부모(父母)에게효도(孝道)하는것 시경(詩經)에 이르되 뷺아버지여 날 낳으시고 어머니여 날 기 르시니 이 덕(德)을 갚고저 할진대 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다뷻하 고 또 말하기를 뷺성명혈육(性命血肉)은 다 어버이의 소유(所 由)이니 숨을 호흡(呼吸)함과 기맥(氣?)이 상통(相通)함이 이 몸이나의 사물(私物)이아니고이에 부모(父母)의남긴 기운인 까닭에슬프다부모여날낳으시기를수고롭게하셨다.뷻하였다. 만물에가장귀한것은내몸이고내몸은이에부모의끼치신 바 이 니 비 록 천 하 의 물 건 을 다 들 더 라 도 이 한 몸 을 바 꾸 지 못 할 진대 부모의 은혜 마침내 어떠한가 세월이 쉬임 없어 오랫동안 어버이를 섬길 수 없으니 인생(人生) 백세(百歲)에 섬길 날이 얼마인고!까닭에 남의 자식된 이 모름지기 정성과 힘을 다하여 행여 불급(不及)할가 할지니 증자(曾子) 말씀하시기를 「나이 이미 늙어지면 비록 효(孝)하고저 하나 누구를 위하여 효(孝) 하리요」 하시니 효(孝)하는이 마땅히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하 여 눈물 흘리게 할 것이고 또 말하기를 고인시(古人詩) 뷺옛 사 람이 하루 봉양 하는 것을 삼공(三公)으로 바꾸지 않는다뷻하니 이른바 날을 아끼는 것이 이것이다. 범인(凡人)의 부모 은혜를 알지 못하고 어버이에게 효도 할 사람이 심히 적으니 아깝도다. 어버이를섬기는이그마음을즐겁게하여뜻을즐겁게하고한 일 한 행동을 감히 제멋대로 하지말고 반드시 물어 행(行)할지 니 만일 할만 한 일을 부모(父母)가 허락지 않으시면 반드시 시 운을 내리고 낫빛을 화(和)하게 하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고 (告)하여허락하신뒤에행할것이다. 부모의 사랑하는 것을 마땅히 사랑하고 부모의 공경하는 것 을 마땅히 공경하여 일상생활에 잠깐이라도 부모를 잊지 않은 뒤에야만스스로어버이에게향하는정성이있으리라 매일 날이 새려하면 세수하고 머리 빗고 의관(衣冠)하고 부 모 계신 곳에 가서 따듯하고 추움과 안부(安否)를 묻고 날이 저 물면 침소(寢所)에 나아가 요와 돗자리를 펴고 따뜻하고 서늘 함을 살피고 물러가기를 명(命)한 뒤에 물러나며 힘껏 맛있는 공물(供物)을 얻되 반드시 몸소 맡아 친히 비찬(備饌)하여 어 버이 입에 맞게 하며 출입기거(出入起居) 할 때 반드시 조심스 레 부호(扶護)하며 부모 병환이 계시면 감(敢)히 곁을 떠나지 말고 마음으로 금심하고 낫빛이 막혀 남은 일을 놓아두고 의사 를 맞아 처방(處方)을 검토하고 약이(藥餌)를 골라 맛보며 희 롱하여 웃지 말고 잔치하여 놀지 말고 다만 증세(症勢)를 살펴 회복하기를기약(期約)할것이다. 밖에 나갈 때는 반드시 절하고 사례하고 들어오면 반드시 절 하고 뵈이며 부모 앉는 곳에 아들이 감히 사객(私客)을 맞지 못 하며 말 오르내리는 곳에 아들이 감히 오르내리지 못하는 것은 감히스스로부모에의비(擬比)하지못함인것이다. △남편과아내 남 편 된 이 화 (和 )하 여 의 ( 義 )로 분 별 하 고 아 내 된 이 순 (順 ) 하여 정(正)으로 이어 례(禮)와 경(敬)을 잃지 않은 다음에 가 도(家道)가 서진다. 지금 사람들이 부부(夫婦) 잠자리에서 많 이 정욕(情慾)을 놓아 그 위의(威儀)를 잃다가 하루 아침에 문 듯서로위엄을세우려잘 되어지지 않는것이다.또 부부(夫婦) 서로 화순(和順)하면 제가(齊家)하기 어렵고 내외(內外) 뜻이 다르면 모든일이 다 풀어지리니 례(禮)는 순(順)하기만 하지 못할것이다.조심스럽게두렵지않은가 △형(兄)과아우 부 모 (父 母 )의 한 몸 을 같 아 받 아 몸 을 나 누 니 형 제 ( 兄 弟 ) 한 몸같은지라 어찌 피아(彼我)의 사이가 있으랴 음식 의복과 걱 정되는 일 즐거운 일들을 다 마땅히 함께 할지니 설사 형제(兄 弟)가 혹 배부르고 혹 주리며 혹 따뜻하고 혹 추우면 이는 한몸 의팔다리가혹병들고혹건강한것이다. 만일 선행(善行)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하여 서로 힘쓰게 하고 불선(不善)한 행동이 있으면 마땅히 정성껏 충간(忠諫)하 고 이치로 깨워 감오(感悟)하게끔 할 것이요 낫빛을 붉히고 말 을거슬러화기(和氣)를잃지말도록할것이다. △ 벗 과 벗 사 이 벗을 가리되 학(學)과 선(善)을 좋아하는 이를 취하여 반드 시 친근히 통정(通情)하여 더불어 동처(同處)하고 또 단정한 사람을 취하되 나보다 나은이를 가려 신(信)으로 책선(責善)하 며 道로 忠告하여 오래 갈수록 공경할 것이요 불선(不善)한 자 (者)는 그 악(惡)을 말하지 말며 그 루(陋)를 들추지 말고 범연 (泛然)히 득하고 공경스레 멀리 할 것이고 만일 서로 아는 자 (者)는 다만 안부인사만 하고 다른 말을 접(接)하지 않으면 자 연히 멀어져 음식(飮食)을 많고 좋은 것을 숭상하지 말고 마땅 히정결하게하면비록도시락밥표주박국물이라도다좋은취 미가 될 것이다.(음식(飮食)위에 빠진 글이 있는 듯 하니 이것 은 분 명 다 른 말 이 다 .) △가난에편히하는것 대개 군자(君子) 도(道)를 걱정할 것이고 가난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니 다만 가난하여 살아갈 수 없으면 궁핍을 구제할 계 책을 생각할 따름이니 기갈(飢渴)을 면(免)하고 한서(寒暑)를 갖추면 이 또한 족(足)하다. 옛날 이른바 좋은 밭 만경(萬頃)이 라도 하루 먹는 것은 이승(二升)이고 큰집 천간(千間)이라도 밤에 눕는 것을 팔족(八足)이니 어찌 반드시 죽은 후(後)의 자 손(子孫) 계획으로 마음을 쓰고 생각을 태워 죽도록 부지런히 이익만 추구하랴 옛 사람이 자경(自警)하는 속담이 있으니 말 하기를 「누에는 늙어 고치만 짓고 몸도 가리지 못하며 벌은 주 려꿀만더움게하여남의이익만제공하니나이늙어집을걱정 하는 이는 두 벌레처럼 헛 고생만 하는 것과 같다.」하니 진인달 사(眞人達士)의천명을 아는 말이다. 다만 우리 집이 본래 한사(寒士)로 가난하게 살고 검소함을 힘쓰닥 일조(一朝)에 비분(非分)의 은혜로 외람되게 훈반(勳 班)에 참여하여 영지(領地)를 주시니 영화(榮華) 이미 극진하 고 품수(品數)이미 높았는데 희비(喜悲)와 흥체(興替)는 천지 (天地)돌고 도는 상리(常理)이니 길이 자손(子孫)의 부귀(富 貴)향유(享有)하기를감히바라지못할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산업(産業)을 힘쓰지 아니하고 급(急)한대로 써버리기만 힘쓰는 자(者)는 후손의 재화(災禍)부를것이 두렵 지아니한가? 원(願)컨대 모든 학도는 가난으로 분수(分數)에 편히하면 만 족(滿足)을 알아 또한 즐거울 것이니 만족을 알지 못하는 자는 비록부귀(富貴)라도또한걱정인것이다. △자제(子弟)를가르치는것 자제(子弟)를 가르치되 마땅히 예법(禮法)으로 인도하여 어 려서부터 크도록 서책(書冊) 필묵(筆墨) 밖에 기타 잡기(雜技) 와음란한말은앞에가까이말고입에걸지말아술과풍악을익 히지 말며 놀로 다니지 말게 하고 넓게 배우고 뜻을 독실하게 하 며간절히묻고생각을가까이하면인(仁)이그속에있으리라 지금 세속(世俗)을 보건대 부모가 그 아들을 잘 가르치지 못 하고 아들이 그 가르침을 잘 받지 못하여 유희(遊戱)하는 장소 에 불러 모이며 시끄러운 거리에 술 취해 거꾸러져 몸을 버리기 를 오물(汚物)같이 하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니 이는 자식 없 는것만도못하다.어찌슬프지않으며경계할일이아니랴 △ 일 가 간 무믓 동종(同宗)의 일가 그 처음은 한사람의 몸이니 한사람 의 입 장 에 서 보 면 백 지 천 파 (百 支 天 派 )가 모 두 나 의 한 몸 인 데 어찌 사랑하지 않으리요 쉬임 없이 상대(相對)하여 정(情)을 토로(吐露)하며 선(善)과 악(惡)에 친절하게 깨워 서로 반드시 감오(感悟)하게끔 하고 비록 촌수를 따지지 않는 먼 일가라고 그 항열(行列)을 따라 아재 형을 찾고 친절히 접대하는 데에 소 홀함이없게하고이성(異性)의친척에도또한같이할것이다. 뱚계학도문(戒學徒文)(學徒를경계하는글) 1.관련 가.정관 제 8조,제14조,제16조 나.선거관리규정제5조,제10조 2.위관련으로밀성박씨밀산군판서공파(부마공파대종회)임원선출을실시함. 가)일시 :2017년 11월 25일 17:00 나)장소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남리 173(숭의재실) 다)의결안건 - .임원선출(대표회장1인,감사2인) - .사업계획심의의결(차기년도) - .2017년도 시제 봉헌에 대한 의결 - .기타중요한사항 3.입후보서류 교부및접수 가.정관및선거관리규정에의거하여시행 나.접수방법안내(서류교부) - .관련규정에의거하여소정약식교부후구비요건완비접수 다.회장,감사출마희망자는준비하시기바랍니다. - .선거당일(총회일)출마서류접수가능. 4.기타선거관련(후보등록사항등)에관한문의는아래번호로연락하시기바랍니다. - .문의 010-9664-0008 2017년도 10월 28일 밀성박씨밀산군판서공부마공파선거관리위원회 밀성박씨밀산군판서공(부마공파)대종회(직인생략) 밀성박씨밀산군판서공(부마공파)정기총회및 임원선출을아래와같이실시함 지 난 호 ( 제 1 2 9 호) 6면 ‘박문의 족보이야기’ 중 충주박씨 성화 보 발행년도를 1574년을 1474 년 ( 甲 午 ) 으 로 바로잡습니다. 뱚뱛바로잡습니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