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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0월31일 화요일 6 (제130호) 특집 화산서원은 지역의 후학양성을 위해 1504년 지은 안락재(安 樂齋)에서 유래된다. 강당(안락재) 뒤에 세워진 화산사는 박수 기(朴秀基), 박상(朴祥), 김정(金淨), 박지견(朴枝堅), 박순(朴 淳),박지효(朴之孝)등 학문과 절의가 뛰어난 분들의 위패를 모 시고 제사 지내는 곳으로 1961년 전국 각지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웠다. 경내에는 화산사와 강당으로 사용되는 안락재(安樂齋) 가 있으며,안락재는 정면 4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화산사 는 정면3칸 특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로 1984년 전라북도문화재 자료제34호로지정되었다. 안락재는 당대의 문인이자 학자인 중봉 조헌, 우계 성혼, 고봉 기대승, 서하당 김성원 등이 교류하며 남긴 시문이 전해져 오고 있어안락재의위상을짐작해볼만하다. 안락재를 지어 후학양성을 해온 안락재 박지견 선생은 학도들 을 가르침에 △ 임금에 충성하는 것 △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 남편과 아내 △ 형과 아우 △ 벗과 벗 사이 △ 가난에 편히 하는 것 △자제를 가르키는 것 △일가 간 등의 경계하는 글 계 학도문 (學 戒學徒文)를 지어 가르쳐 현세의 우리들에게 교훈으로 남겨 진다. 특히 배향된 선현에 대한 평가는 주련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 으며, 중봉 조헌 선생과 호남의 거유 고봉 기대승 선생이 습독공 을만난이후건넨시(詩)를보면더욱드러난다. 이에 이번호에서는 화산서원 강당의 안락재와 배향인물, 계 학도문(學戒學徒文)을인용하여알아본다. △중봉(中峰)조헌(趙憲)고(稿) 西臺寺遇朴習讀成堅夜道退溪思庵事甚詳 三首(서대사우박습 독성견야도퇴계사암사심상 삼수) /서대사에서 습독관 박성견 을 만나 밤중에 퇴계와 사암의 일을 퍽 상세하게 이야기 하였다. 3수 【二老先凋灸未親(이노선조구미친)두 분 원로가 먼저 세상을 떠나 가까이 하지 못한 것 괴로워하던 터/逢公 苦見元賓(봉공 황고견원빈) 공을 만나니 황홀히 원빈을 만난 듯 하다/ 喜聞中 國欽風雅(희문중국흠풍아) 중국에서 그분들의 풍아를 흠모한 일 들어서 기쁘거니와/ 樂見東方領搢紳(락견동방령진신) 동방 에서 그분들 같은 진신 가진 것 알게 되어 반갑다/可靜南夷威北 狄(가정남이위북적) 남이를 평정하고 북적을 위압할 수 있었을 것이고/ 庶容賢士慰愁民(서용현사위수민) 현사들을 포용하여 시름찬 백성들을 위무 하여 주었을까/ 九原可作悲無策(구원가 작비무책) 저승에서 살려낼 방법 없음이 서럽거니와/ 恨乏嘉謨 爲主陳(한핍가모위주진) 좋은 책모 임금위해 개진할 것 없음이 한스럽구나/ 盤桓高寺感秋蓬(반원고사감추봉) 고상한 절 배회 하며 가을의 쑥대에 감개를 부치다가/ 得聞先賢二老風(득문선 현이노풍) 선현 두 분의 풍모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箕範茫茫 人底處(기범망망인저처) 기범은 망망한데 사람들은 어디에 있 는건가/傷時憂國自 (상시우국자충충)시대를 슬퍼하고 나 라를 걱정하여 절로 괴로워진다/ 退谷先生難進時(퇴곡선생난 진시)퇴곡선생이나오기어려웠을때에/思庵大老獨賢之(사암 대노독현지) 사암 대 원로는 홀로 그를 훌륭하게 여겼다/ 高山 仰止人多語(고산앙지인다어) 높은 산 우러러야 한다고 사람들 이 많이 말을 했는데/ 平仲如何不뒈뒬(평중여하부뉵니) 평중은 어 찌 하 여 부 끄 러 워 하 지 않 는 가 ? 】 註☆진신(搢紳)-지위가높고행동이점잖은사람,벼슬아치☆남이(南夷)- 예전에, 중국에서자기나라의남쪽지방에사는족속들을얕잡아이르던말. ☆원 빈(元賓) - 中唐때 발군(拔 綠)의 천재성(天才性)을 지녔던 이관(李觀)의 자 (字)습독공을이관에비유함.☆평중(平仲)-제(齊)의재상(宰相)안영(晏 잤 )의자(字),당시당로재상(當路宰相)을두고한말. △고봉(高峰)기대승(奇大升)고(稿) 素朴習讀宅次松川韻(왕박습득택차송천운) 박습독 집에 가서 송천의시에차운하다 【雨淨溪山日氣和(우정계산일기화) 비 갠 산천에 날씨도 화창 한데/佩壺來集故侯家(패호래집고후가)술병차고옛친구의집 에 모였네/ 正憐綠柳垂絲 (정련록류수사타) 어여뻐라 실처 럼 늘어진 버들에/ 時有黃鶯側過 (시유황앵측혈과) 때때로 꾀꼬리 날아들기도 하누나/ 秩秩射帿觀善盛(질질사후관선성) 질서 있는 활쏘기에 선을 봄이 성하고/ 轟轟歌鼓發歡多(굉굉가 고발환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 기쁨도 많구나/ 元龍更覺風流在 (원룡경각풍류재)원룡은 다시 풍류가 있음을 알겠으니/靑眼猶 應送落霞(청안유응송락하)푸른눈으로응당지는노을보리라.】 註 ☆ 송천(松川) -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의號. 조선중기의문신으 로 교리양팽손(梁彭孫)의아들순창군수를지냄. ☆원룡(元龍) -삼국시대위 (魏)나라진등(陣登)의字 △서하당(棲霞堂)김성원(金成遠)고(稿) 招朴習讀成堅(後改枝堅) 습독관 박성견을 초청함(후에 지견 으로개명함) 【原草翠如織(원초취여직) 들판의 풀 베짠 듯이 저리 푸르고/ 山花紅欲燃(산화홍욕연)산꽃은불타는듯붉게피었네/尋春嗟 已晩(심춘차이만)봄찾다가이미늦음탄식하노니/思與過前川 (사여과전천)그대함께앞시내를건너고싶네】 △십이대손(十二代孫)수섭(洙燮)삼가지음 金古堂忠浩送其傍祖棲霞堂公諱成遠文集,以詩招我先祖習讀 公故余感而奉和因招古堂(김고당충호송기방조서하당공휘성원 문집,이시초아선조습독공고여감이봉화인초고당) 고당 김충호 가 그 방조되시는 서하당공 휘 성원의 문집을 보냈는데, 시로서 내 선조이신 습독공을 부르셨기에 내가 느낌이 있어 삼가 화답 하여고당을초대하다 【原草于今織(원초우금직) 들판의 풀 지금껏 저리 푸르고/ 山 花萬古燃(산화만고연)산꽃은만고에불타는듯해/春詩霞稿出 (춘시하고출) 봄 시가 서하당의 글에 나오니/ 同詠過前川(동영 과전천)함께읊으며앞시내를건너가세나】 註: 선조고유고가화재에들어안락재원기원운과 계학도문만 전해지고, 율곡우계제현과 교류하신문헌도찾지못하니어찌애석하지않으리요. 안락재는 습독을 지낸 안재 박지견 선생이 연산 갑자년(1504) 년 후학양성을 위해 건립하여 수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 다.최근 중수는 1945년 이다. 습독공이 지은 안락재기는 부귀와 공명을 멀리하고 대나무의 곧은 절개와 소나무와 새소리를 벗 삼아 안빈낙도하였던 삶을 엿볼 수 있고, 영연(楹聯)을 보면 배향된 선조를 향한 후인들의 다짐을알수있다. △안락재기(安樂齋記) 고인(古人)의 락(樂)을 삼는 것이 하나뿐이 아니어서 혹(惑) 사물(事物)에 취(取)하여 즐거워 하는 이도 있으며 혹 도에 뜻 을 두어 즐거워하는 이도 있으니 그 즐거워하는 취미는 비록 다 르나그즐거워하는의(義)는하나이다. 내가 산(山)에 들어온 뒤로부터 연이어 서로 따르는 향중사우 (鄕中士友)가 있어 혹(惑) 성현(聖賢)의 글을 강(講)하여 문답 (問答)하고 혹(惑) 당세(當世)의 일을 말하여 논의(論議)하니 이로부터 이에 안락(安樂)하여 스스로 혼자 머뭇거리는 생각을 편케 하고 도(道) 같은 이 서로 좋아하는 뜻을 즐거워하여 안락 (安樂)으로내집을이름하여학이편(學而篇)붕래역락(朋來亦 樂)의 뜻을 우러러 배우려하더니 하루는 객(客)이 나에게 지나 며 묻기를 「당신의 안락이자(安樂二字)를 게액(揭額)한 것은 무슨 이유인고? 공자소수(孔子蔬水)의 락(樂)을 취함인가? 아 니면 안연단표(顔淵簞瓢)의 락(樂)을 취(取)함인가?」 내가 우 물쭈물 사양하여 말하기를 「내 본래 넓은 학식(學識)이 없어 사 물(事物)의 취해짐을 모르는데 하물며 도(道)에 말할 수 있겠는 가 이 집이 깊숙이 한적(閒寂)한 곳에 있어 보이는 것이 녹죽창 송(綠竹蒼松)일뿐이며 들리는 것이 소수제조(疏水啼鳥) 일뿐 이라 이 송죽조수(松竹鳥水)의 락(樂)을 취함은 되거니와 소수 (疏水)의 락(樂)과 단표(簞瓢)의 락(樂)은 감히 바라지 못 할 뿐 만 아니라 나의 변변치 못한 후생(後生)으로 어찌 능(能)히 선 성(先聖, 옛 성인)의 깊은 뜻을 알아 즐거워 하리요? 비록 그러 나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순(舜)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인가? 노 력 ( 勞 力 )하 는 이 또 한 순 (舜 ) 같 이 된 다 .” 하 니 지 금 스 스 로 포 기하고 홀로 힘쓰지 않으면 곧 고인(古人)의 죄인(罪人)이 됨이 니 오 직 공 안 (孔 顔 ) 의 학 ( 學 ) 하 심 으 로 학 (學 ) 을 하 고 공 안 ( 孔 顔)의 즐거워하심으로 즐거워하여 힘써 성공(成功)하면 그 공 안(孔顔) 지도(志道)의 락(樂)엔 비록 능히 만(萬)에 하나 미치 지 못하더라도 다행히 오늘 안분독학(安分篤學)의 樂에 혹(或) 적은도움이있으리라」 객(客)이 이에 빙그레 웃고 물러가거늘 내가 문답(問答)한 말 을 서술(敍述)하여 기문(記文)을 적노라 이어 시(詩)를 읊되 작 금(昨今)에 두어 칸을 경영하여 안락(安樂)이라 이름 걸고 평생 (平生)을즐거워한다. 고요한가운데풍월(風月)은둘이맑아좋고한가한속에수산 (水 山 )은 한 지 역 (地 域 ) 이 밝 다 시 서 (詩 書 )에 서 이 치 를 얻 어 참 으로 만족(滿足)한데 마음 없는 부귀(富貴)가 무슨 영화(榮華) 인가 아농(啞聾)이 처신함에 무던하구나 시비(是非) 없음이 나 의심정(心情)이다. 알봉곤돈(閼逢-困敦,1504년,甲子)重陽月(九月)에박지견이씀 註단표(簞瓢)- 도시락과 표주박을아울러이르는말로서공자가가장사 랑했던 제자 안연(顔淵)이 청빈한 살림 속에서도 연구와 덕을 닦는 데 전념 하여 학덕이 높아진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것으로 청빈함 속에 즐거움을 함께한다는의미 △安樂齋楹聯(안락재영연) 倫綱扶天地元氣(윤강부천지원기) 윤강은천지의원기를붙들었고 忠義爭日月正輝(충의쟁일월정휘) 충의는일월의바른빛을다투도다 淵原自洛벵正脈(연원자락민정맥) 연원은정주의정맥으로내려오고 絃誦繼鄒魯遺風(현송계추노유풍) 현송은공맹의유풍을이었도다 灌현旣備具是陳(관창기비구시진) 제수를잘갖춰진설하고 駿 奔 觀 儀 式 不 ( 준분관의식불특) 제관진퇴의식이틀리지않도다 註-현송(絃誦)거문고를타며시를읊음 △파은공박수기(朴秀基,1429~1510) 선생은 유성에 최초 정착한 참의공(휘 진)의 손자이고, 사복 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가의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된 휘 충함 과 정부인김씨와의 사이에 5남3녀중 삼남으로 충청도 유성에서 태어났다. 도학명절(道學名節)이 세상의 추앙(推仰)한 바 되어 성종조(成宗朝)에 가의대부(嘉義大夫) 강원도(江原道) 관찰사 (觀察使)에 이르렀으나 연산혼조(燕山昏朝)를 만나 전북 장수 군 계남면 기산리로 낙향하여 집 짓고 우물파서 명철(明哲)하게 보신(保身)하였다. 이후 인접면인 장계 노평의 기암(奇岩, 자라 형) 위에 자락정(自樂亭)을 짓고 30여 년간 후학을 양성(養成) 했으니, 지금도 ‘장수문화개발’에 가장 공(功)이 크신 선생이라 는 정 평 이 있 다 . 자락정서(自樂亭序)와 원운(原韻), 그리고 족부족시(足不足 詩,만족하고 만족하지 못한 것)에 보면 선생의 고아(高雅)한 풍 모(風貌)를엿볼수있다. 특히 족부족시 28장은 시문학사상 최초기법으로 가(可)히 탁 세(濁世)의 청량제(淸凉劑)가 될 만하다.서문(序文)은 말미(末 尾)가 더욱 좋다 한다.「큰 못이 앞에 있어 고기 보기 즐겁고, 송 국(松菊)이 창(窓)에 휘어져 깨끗한 기품이 사랑스럽네, 좋은 술을 기울여 취흥을 돋우고, 달빛아래 금슬(琴瑟)로 태평을 노 래한다. 용신(容身)할 만 한 안식처를 찾을 뿐, 어찌 분외(分外) 의 영화를 바라리오!이 또한 즐거운데 뉘라서 감히 깔보랴!노래 가 나오누나, 이 같은 늙은이여 고금(古今)에 드물도다. 자자손 손(子子孫孫)이여 끝없는 복이로다.거꾸러지도록 몹시 취하니, 갈천씨(葛天氏)의 민(民)이로다,태평 세월을 노래하니 무슨 제 력(帝力)이있으리오.」 선생의 저서(著書) 태극도설(太極圖說), 이기강설(理氣講 說), 심성분설(心性分設), 신체요설(身體要設), 사군사친지론 (事君事親之論), 형우제공지설(兄友弟恭之說) 등도 모두 이 정 자(亭子)에서나왔다.선생의재종질(再從姪)되시는문충공(文 忠公) 사암(思庵) 박순(朴淳) 선생은 자락정기(自樂亭記)에서 선생을다음과같이표현하고있다. “ 公 은 천 품 ( 天 稟 )이 뛰 어 나 서 밝 은 지 조 가 있 으 니 명 절 ( 名 節 ) 의 높음과 학문(學問)의 알참과 문장(文章) 덕업(德業)의 성 (盛)함이 해와 별처럼 밝다(原文 :公은 天資穎異하고 淸介有志 하야 名節之高와 學問之實과 댑夫文章德業之盛이 昭如日星) 하니선생의수양(修養)을짐작할만하다. △눌재(訥齋)박 상(朴祥,1474년 ~1530년) 선생은 참의공의 동생 판서공 휘 소(蘇)의 손자이고, 성균진 사(成均進士)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崇政大夫 議政府左贊 成)이 추증뒨 휘 지흥(知興)과 계성(桂城) 서씨(徐氏) 사이의 삼형제중 차남으로 성화 갑오년(성종5년 1474) 5月18日에 태어 났으며,파은공박수기의재종동생이다. 23세(연산군 2년,149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28세 되던 1501 년(辛酉,연산군7년)에 정시(庭試) 을과(乙科) 제5인으로 급제 하여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관직에 나가기시작하였다. 눌재 선생은 세상이 다 아는 己卯名賢의 선구자로 사류(士類) 의 순정(純正)한 정치이념을 실제로 구현시키기 위해 그 방향을 확정(確定)하고서 자신이 선봉 을맡고나섰던인물이다. 선생은 부정과 불의를 보고는 그것을 발본색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감연 (敢然)히 행동을 취하고는 하였 다. 도학 의리실천의 정신을 당 시 사회화(社會化) 시대화(時代 化)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 선 인물로 유명하다. 이에 선생의 의리사상(義理思想)은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 조명 받고 있는 것이다. 선생의 저서 동국사략 (東國史略)과 함께 신비복위소 에서 주자가례의 사대부의 보편 적 인륜(人倫)논리를 왕실에서도 지켜져야 할 것이라고 표출시 킨 의리사상은 후세의 유자(儒者)들에게 선구자적 위상을 갖게 하였다. 조선왕조 정치운영에서 사림(士林)의 존재가 크게 부상하였 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중종 14)에 앞서 이른바 신비복위 소(愼妃復位疏))가 1515년(중종10)에 있었다. 조광조의 기묘사 화에서 보였던 사림들의 정치인식이 이보다 앞선 신비복위소의 내적 논리에 있었으며, 이와 같은 논리 구조는 기묘사화에도 연 계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지적한다. 신비복위소를 만든 선 생은 기묘사화에서 수상중(守喪中)이어서 피해는 면했으나 기 묘사림의 한사람으로 후세 유가(儒家)들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같이 소(疏)를 만든 김정은 기묘사화의 장본인이 었던 것에서도 직접적으로 신비복위소 사건은 당시 사림들의 유 자적(儒者的) 정치관에 비롯된 소신의 표출이었음을 알 수 있 다. 선생은 시문학에서도 특출하다. 선생이 남긴 시는 모두 1,100 여 수가 넘는다. 조선 정조대왕은 선생의 시(詩)에 대해 내린 전 교(傳敎)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詩)로는 오직 고(故) 교리(敎 理) 박은(朴誾)과 증(贈) 이판(吏判) 박상(朴祥) 두 사람 뿐이 다.”고 하였으니 선생의 시문(詩文)이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중시(重試) 장원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오르기도 하였으 나 여생을 외직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자기의 포부를 실현시 키지 못하는데서 오는 오뇌(懊惱)와 동지들을 잃고 외로운 가운 데 에 서 선 생 은 시 주 (詩 酒 )로 자 신 을 달 래 는 길 을 택 할 수 밖 에 없었다. 그러나 어지러운 정정(政情)속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 鶴)으로 독립하여 굳은 절조(節操)를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정정 당당하게 진퇴(進退)하여 후세에 기묘완인(己卯完人)으로 칭 송을받았다. 특히 선생은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고 성현(成俔), 신광한(申光漢), 황정욱(黃延彧)과 함께 서거정(徐巨正) 이후 의 4大文章家로 꼽힌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 고,화산서원과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배향되고,송호영 당(松浩影堂)에제향되며,시호(諡號)는문간공(文簡公)이다. △충암김정(1486성종17~1520,중종15)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충(元沖), 호는 충암(沖菴)·고봉(孤峯). 정암(靜庵)조광조와 함께 사림파를 대표했으며,기묘사화 때 제 주도에 귀양갔다가 〈제주풍토록〉을 써서 기행문학의 성격을 바 꿔놓기도 했다. 3세에 할머니 황씨에게 성리학을 배우기 시작했 고 20세 이후에는 최수성(崔壽)·구수복(具壽福) 등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507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성리학 연 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14년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때 중종이 왕후 신씨를 폐출한 것이 명분에 어긋난다 하여 신씨 복위를 주장하며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 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 은에 유배되었다.얼마 뒤 다시 등용되어 응교·전한 등에 임명되 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 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등을거쳐형조판서를지냈다. 그의 이처럼 빠른 정치적 성장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 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 뒤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었 다가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옮겨졌으며, 다시 신사무옥(辛巳誣 獄)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았다. 사림세력을 중앙정계에 추천했 으며 조광조의 정치적 성장을 도왔다. 사림파의 세력기반을 다 지기 위해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주장했고,왕도정치를 실현 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약의 실시, 정국공신의 위훈삭제(偉勳 削除) 등과 같은 개혁을 시도했다. 시문에 능해 유배생활 중 외 롭고괴로운심정을시로읊었다. 특히 경치를 보고 기개를 기르자고 읊을 뿐 지방마다의 생활 풍속은 무시했던 이전의 기행문학과는 달리 제주도의 독특한 풍 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1545년(인종 1) 에 복관(復官)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화산서원과 보은의 상현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 되었 다. 저서에 〈충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정이었으나 나중에 문간 으로바뀌었다. △습독공박지견(朴枝堅,1481~1563) 공(公)의 휘(諱)는 지견(枝堅)이고 초휘는 성견(成堅) 호 (號)는 안락재(安樂齋)로 파은공 휘 수기의 셋째 아들이고 어머 니는 함창김씨이다. 선생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중봉 조헌, 고 봉 기대승,서하당 김성원 선생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 문을 넓히었다.조산대부 천문예 습독(天文隸 習讀)을 지내다가 심정, 남곤 등 훈구파의 종신들이 파벌을 만들어 도의정치를 표 방하고 유교 본연의 도덕성을 회복하려는 사림파 학자들을 죽이 고 핍박 유배시킬 참변이 일어날 징조가 보이자 관직을 버리고 부친이있는장수로낙향하였다. 선생께서는 장수현 임남면(현 계남면) 화산마을에 안락재(安 樂齋)를 세우고 스스로 호를 지어 안락재(安樂齋)라 하고 시우 들과 더불어 도의를 강의하고 연마하며 후학들에게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 인재를 길러내는데 정열을 쏟았다 선생은 관직에 있으 면서는 충성을 다했으며 혼미한 기미가 보이자 관직을 버리고 산수간으로 은거 하였으니 세상이 윤회하는 것을 짐작하고 나아 갈 때와 물러날 때를 구별하여 달인의 처세로서 부끄러움이 없 었다. 뱚서/원/탐/방 화산서원(華山書院) 전라북도장수군계남면화산길24-21(계남면) 화산서원전경. 뱚안락재(安樂齋) 안락재 안락재기(습독공박지견記송명석근서) 뱚배향인물 지난해화산사제향광경(음9.17)올해제향일은양력11월5일. 화산사 눌재박상선생영정. 뱚▶ 7면 으로 계속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