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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0월31일 화요일 4 (제130호) 관향조 종친회 평지마을은 500여년의 유서 깊은 밀양박씨 집성 촌으로 한 때는 100여 세대의 큰 집성촌이었으나 사업화로 인해 도시로 떠나면서 현재는 10여세대 가거주하고있는전형적인시골마을이다. 비 봉 면 은 원 래 고산군 지역으로 문중이름을 고산문 중 이 라 한 것 도 지 명에서 유래된 듯 하다. 평지마을은 넓고 평평한 한곳 으로 ‘서당 터’ 혹 은 서당이 있는 마 을이라 부르기도 하여 선조님들의 후학양성과 지역 내 토호세족으로서 역 할 과 의 무 를 다 한 것 을 엿 볼 수 있 다. 평지마을 최초 입향은 운봉현감 을 지낸 박 지(朴誌)이다.현감공(휘 誌)는 사헌부 집의를 지낸 휘 사동(思東)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로 생원시에 올라 연산군(燕山君)2년(1496,丙辰)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으로 급제하였다. 한양 에서 태어난 현감공이 남원 운봉현의 임지는 선대 의 누대 세거지인 김제와 가까운 곳으로 풍수지리 적 길지(吉地)로 이름난 고산군에 세거지를 정한 듯하다. 전라북도 김제시 상동동은 증조부 휘 의림, 고조 부 휘 구(球) 5대조 간의대부공 휘 인익의 묘소가 있고, 아버지 증 좌찬성 휘 사동(思東, 사헌부 집 의)의 묘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 것으로 파보에 전 해져,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 좌찬성공(휘 思東)께 서 관직에 의해 한양으로 이주하고,또다시 운봉현 감공이 임지인 운봉에서 가까운 고산군으로 세거 지를옮겼음을알수있다. 운봉현감공 휘 지(誌)는 아들 희정(希貞), 세정 (世貞)형제를두었는데,이중후사가없는동생열 (說)의 대(代)를 잇기 위해 차남 세정(世貞)을 양 자로보내게되었다. 이후 장남 희정(希貞)의후손들은선대의 세거지 인 김제로 이거하고 지금의 평지마을의 입향 중흥 조는 현감공의 동생 이정공 휘 열의 계자(系子)인 평시서(平市署) 직장을 역임한 휘 세정(世貞)으로 18대(代)에걸친500여년 세거지가 된 것이다. 이정공 휘 열(說)은 성종(成宗) 14년(1483, 癸 卯)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40위(70/100) 생원 시에 합격하고, 성종(成宗) 20년(1489) 기유(己 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4/33)로 급제 하여 좌찬성에 오르고 성종조에 청백리로 녹선되 어 후손들은 평지마을에 거주하며 선대의 청빈함 을 계승하며 공명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탐구와 후 학양성을 하였음이 지명 ‘서당터’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입향조 운봉 현감공은 사문진사공 휘 원(元)의 1 2세(世)이다. 사문진사공(四門進士公派)의 휘 (諱)는 원(元)으로 고려조에 사문진사(국자진사) 를 역임했다. 밀성대군(密城大君 휘 언침)의 10世 支孫(시조 39世孫)으로 태사공(太師公) 휘 언부 (彦孚)의둘째아들諱의신(義臣)의 長子다. 고려 때 과거제도를 보면 진사 중에서도 특별히 학문이깊고당시가장중요하게여겼던사문학(四 門學)에뛰어난학자를따로뽑았는데이들을국자 진사(國子進士)라 했다. 국자진사는 많아야 서너 명을 뽑았고 대개는 한두 명이었다. 여러 학자들의 추천을 받아 국자진사가 됨으로써 학문적인 명성 이 전국을 뒤흔들 정도라야 여기에 추천될 수 있었 다. 이에 사문진사공(휘 원)과 그의 아들 휘 교연(四 門博士)의 학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국자진사 는 대 개 한 림 원 (翰 林 院 )에 들 어 가 학 사 ( 學 士 )가 된다. 학사는 정5품의 시독,시강학사(侍讀學士, 侍 講學士)정4품의 학사(學士) 정3품의 학사승지(學 士承旨)가 된다. 이들은 임금의 국정 자문에 응하 게되므로모두존경하고우러러보게된다. 사문진사공의 아들 휘 교연(皎然)은 사문박사 (四門博士)를 역임하고, 그 아들 기보(奇輔)는 대 관전직(大觀殿直)으로 첨지정사에 추증되었다.대 대로 고려조에서 그 이름을 떨쳤으며, 6세에 이르 러 휘 화(華)는 1252년에 출생 통헌대부 밀직부사 상호군에이르고삼중대광우정승판전리사에추증 되었다. 충효로서 세인의 칭예를 입었다. 인간(仁 幹),인지(仁祉),인기(仁杞),인익(仁翊),인우(仁 宇) 등 5형제를 둠으로서 가문이 크게 번성하는 계 기를마련했다. 첫째 인간(仁幹)은 1300년 문과에 등과하고 131 5년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보문각 대제학으로 충성을 다하여 의리를 지켜 이찬공신 광정대부에 봉하였고, 첨의평리 한성부윤에 올라 왕제를 호종 하여 중국에 들어가서 원나라 세자의 스승이 되었 다가 돌아가시니 시호를 문경이라 하였다. 현재 그 자손이중국에살고있어국내에는없다.익재이재 현선생이그충효를칭찬하였다. 둘째 인지(仁祉)의 호는 죽천(竹川)으로 문과에 올라사설서령(司設署令)을 지냈다. 셋째 인기(仁杞)는 고려 때 판도총랑(版圖摠郞) 과 용궁현감(龍宮縣監), 좌우위산원(左右衛散員) 을역임하였다.고려말어지러운정치를피하여차 자 휘 길(桔)과 함께 관북(함경북도 일대) 영흥에 들어가 유유자적하였으며, 첫째 아들 휘 의중(宜 中)은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넷째 아들인 휘 인익(仁翊)은 고려조에 간의대 부(諫議大夫)로 고려가 망함에 따라 전북 김제로 낙향 조카인 정재공과 함께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 켰다. 슬하에 4형제[염(琰), 종(琮), 정(珽), 구 (球)]을 두었으니 넷째 휘 구(球)는 입향조 운봉현 감공의고조가된다. 간의대부공의 사남 휘 구(球)는 고려 원종 때 문 과에 올라 이조좌랑으로 정순대부 판소부시사 밀 직사사 소용대장 좌우부도통을 지내니 호두금패 (虎頭金牌)와 만호후(萬戶候)의 인(印)을 하사받 았다. 장남 윤림(允林)은 한성부 판윤을 역익하였 으며, 차남 의림(義林)은 신령 감무를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차남 유(維)는 목천현 감으로 손자 이정공(휘 열)의 귀(貴)로 병조판서 에 추증되어 병조판서공파로 세계를 잇고 있으며, 운봉현감공의조부가된다. 현감공의 아버지 휘 사동(思東)은 예종(睿宗) 1 년(1469, 己丑)에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 4위 (7/33)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로 아들 이정공의 귀 (貴)로 인해 숭록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지경연춘 추관사 홍문관제학에 추증되었다. 사간원 정언에 재직시 직언을 서슴치 않았으며, 불의를 저지른 관 원에게는 엄격하게 처벌하였고, 당시 종친들이 과 거에 참여하는 문제를 누구도 제기하지 못하였으 나 종친이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 금지할 것을 청하 는 글이 성종실록 8권, 성종 1년(1470) 10월 19일 계해2번째기사에전해지고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박사동(朴思東)이 와 서 아뢰기를, 뷺이제 종친(宗親)에게 과거에 나아갈 것을허락하였으나,무릇과목(科目)을설치하는것 은소원(疎遠)한어진선비를얻어서채용하고자하 는것인데,종친이야어찌과목을기다려가지고그 재주를 알게되겠습니까?청컨대 과거에 나아가는 것을허락지마소서.뷻하니전지하기를,뷺비록종친 이라 하더라도 어찌 능히 일일이 그 어질고 못한 것 을알겠느냐?다시말하지말라.뷻하였다.】 입향조 운봉현감공은 사헌부집의를 지낸 휘 사 동(思東)의 아들 오형제 중 넷째로 문과에 급제하 여 운봉현감을 지내고 후사가 없는 동생 이정공에 게 차남 세정(世貞)을 출계(出系)시켜 후사를 잇 게 하 였 다 . 이정공은 1464년(세조10)년에 태어나 1483년 (성종14) 생원시, 1489년(성종20)년 식년시(式年 試) 문과(文科) 을과(乙科) 1위(4/33)로 급제하여 승문부정자와 홍문관 부교리에 이어 봉정대부 행 승문원 교감 지제교 겸 교서관 교리(奉正大夫行承 文院校勘知製敎兼校書館校理)로서 성종실록 편수 관에 뽑혔다. 이후 주요 요직을 거처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간 것이 한번이고, 형조판서(1회), 공조 판서(2회),예조판서(2회),이조판서(3회),대사헌 (4회), 대제학(1회), 참찬과 찬성(6회), 판부사(1 회 )를 역 임 하 는 동 안 청 렴 한 관 리 의 표 상 이 되 어 중종반정 때 연산조의 도승지를 역임하였음에도 화를 입지 않고 중용되는 관리로 남았다. 성종조에 청백리에 녹선된 바 있고 중종 임금은 ‘청백전가 (淸白傳家)’의 어서를 내려 청백함을 만천하에 알 렸다. 이정공의 아들 세정(世貞)은 평시서 직장으로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 재종 형 희정(希貞)의 삼남 옹( 죙) 으 로 하 여 금 후 사 를 이 었고, 옹( 죙)은 선조(宣祖) 1년(1568, 戊辰) 증광 시(增廣試) 병과(丙科) 10위(20/33)로 급제하여 한성부 서윤을 거쳐 밀양, 함양, 정읍, 지례 등 7郡 군수와부사를역임하고아들삼형제를두었다. 장남 충남(忠男)의 號는 이우당(二憂堂)평시서 직장으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덕업(德業)을 쌓았 다. 차남 효남(孝男)은 선조 신축년(1601)에 문과 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 추 증되었고, 삼남 제남(悌男)은 통덕랑으로 사헌부 집의에추층되었다. 이들 삼형제 중 평지마을 후손들은 장남 충남(忠 男)의 후예들로 현재 4천 여명의 후손들이 전국에 산재해있다. 고산문중의 유적은 단연 최고의 길지인 선조님 의 묘역이다. 고산면 서봉리 산44번지의 선영은 종 산에서 내려온 산줄기(來龍)가 백두태조산(白頭 太祖山)으로부터 남하하여 천리일주(千里一走)로 백두대간을 지나 금남정맥(錦南正脈)에 이르러 주 췌산(珠萃山)에서 분기(分岐)하여 불명산(佛明 山) 만목산(萬木山)을 거쳐 수령(秀嶺)에서 분기 (分岐)하여 고산서봉(高山西峰) 장록(長麓)에 안 장된 운봉현감공 묘소와 이정공의 아들 세정(世 貞)을비롯한선조님의묘역으로일부는2009년 면 봉하여 면봉비가 세워져 있고, 산 아래 세장비가 있다. 평지마을의 후손들은 선조의 청백함을 되새기 며, 토호세족으로서 지역의 대소사를 직접 챙기면 서지역주민들로부터찬사가이어진다. 마을회관을 비롯한 입구 표지석 건립 등 대부분 후손들의 헌성금으로 지어져 회관 입구와 표지석 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특히 후손들은 종중발 전에 크게 기여한 선조님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 13년 이정공의 16세손 호근(護根),17세손 병환(炳 煥) 公과 2017년 봄 16세손 태근 公의 공적비를 세 웠다. 만권당 박태근 선생은 종중발전은 물론 우리 나라 영문학 교재가 귀했던 1960년대 후반부터 외 국의 서적을 어렵게 들여와 번역 출간하여 전국72 개 종합대학에 기증하고 학생들에게는 저렴하게 제공하여영문학발전에크게기여한바있다. 고산문중의 전근(全根)회장은 종사입문 36년여 동안고문서를탐독하며선조의약사를정립하고2 회에 걸쳐 편수위원으로 파보편찬을 주도하고 경 주 청명대제 신덕왕릉 대축관으로 활동하는 등 대 내외적으로 중중의 위상을 높여 왔으며, 내적으로 는 종원들이 한데 어울리고 화합하는 길을 다듬어 왔다. 특히 임원진의 연령대를 낮추어 젊고 원로들 의 지도에 생동감이 넘치는 종회를 만들어 매월 정 기적인 모임을 통해 선조의 유훈을 되새기도록 직 접 유적을 탐방하여 토론하고,매년 벌초를 전문업 자에게 위탁했던 것을 종중 임원들이 직접 함으로 서 땀의 소중함을 체험하고 종원 간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행사로 발전시켜 물질적인 유산보다 정 신적인 유산을 물려줌으로서 ‘청백전가(淸白傳 家)’의명문가임을보여주고있다.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집성촌 탐방 전북완주군비봉면수선리평지마 을 밀양박씨사문진사공후이정공파고산문중 비봉면수선리평지마을전경. 고산문중선영전경(고산면서봉리산44번지) 마을입구에세우진마을표지석과 박태근선생공적비. 고산문중의 전근 회장(右)이 입향 약사와 선조님의 묘역 면봉사업을 설명하며 7년전 귀촌한 만권당 태 근현종(左)과 함께하고있다. 뱚입향선조약사 운봉현감공묘소및면봉비. 입향중흥조휘세정묘(맨위)및이하 선조님묘역 . 뱚유적과후손 세장천비및공적비(이정공의16세호근,17세병환) 이정공의 1489년(성종20)년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 방 목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