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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10월31일 화요일 2 (제130호) 기 획 븮삼국사기븯는 927년 한겨울, 신라 55대 경애왕이 포석정에 유행(遊行)하여 주흥에 빠졌고, 때마침 신라에 침입한 견훤 에게 체포되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 11월조, 븮삼국사기븯권50 열전10 견훤조 . 이로써 경애왕 자신의 몸은 죽고, 동생 효렴은 압송되었으며, 군신은 포석정에 함몰되었고 나라는 견훤에게 짓밟혔다. 그 욕됨은 인구에회자되며천지에두루미쳤다. 당시 견훤은 경애왕을 죽인 것은 물론 경애왕의 왕비를 겁 간했으며 군사들을 풀어 궁중의 비빈마저 집단 겁간하는 등 일대 난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 년11월조. 븮삼국사기븯는, 자만과 독선에 빠져 일족과 군신, 비빈 모두 가 괴멸하는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은 경애왕이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경애왕뿐만 아니라 왕비의 문제에까지 세세 한 설명을 담아 숱한 세월에도 바래지지 않을 상흔을 뚜렷이 역사속에아로새겼다. 주지하듯, 경애왕은 신라사에서 존재하는 10명의 박씨 왕 가운데 최후의 박씨 왕이다.현재 박씨 일문은 모두 경애왕 친 형 경명왕의 핏줄을 내세운다. 까닭에 경애왕의 주홍글씨는 박씨 일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였고,필히 밝 혀야 할 미궁의 숙제이기도 하였다. 더군다나 집안의 할머니 가 여자로서 견딜 수 없는 치욕, 겁간을 당했으며, 그러한 사 실들이 역사책의 갈피에 버젓이 실려 있어 세대와 세대를 전 하여 학습된다는 것은, 관련된 일문이라면 모골이 송연해지 지 아니할 수 없을 대목이다.단언컨대 경애왕 죽음에 더하여, 경 애 왕 왕 비 의 겁 간 문 제 에 도 다 같 이 관 심 을 쏟 지 않 을 수 없 는까닭이이에있다. 경애왕의 죽음, 최후 행적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의문은 기 록 자체의 문제이다. 븮삼국사기븯기록을 통틀어 경애왕 사인과 시해 주체 ①견훤에의한 逼殺(逼令王自盡 (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 2 경애왕 4년 11월조; 븮三國遺事븯 권2 기이2 김부대왕조), ②견훤에 의한 타살(弑王于鮑石亭 (븮동사강목븯 5하 경애왕4년); 至前컴 之(븮삼국사기븯권 50열전10견훤; 斬戮君王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③ 3자에 의한 타살(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견훤이 왕 건에게 보낸 서한’ 중)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견훤 항목에서 븮삼국사기븯찬자는 컴을사용하고있고,인용된‘왕 건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에는 斬이란 글자가 사용되어 있다. 컴이란그 저‘죽이다’의의미인반면, 斬은목벨참으로 참수를의미하므로 왕건이 좀 더 통렬한 야유를 담고 있다. 이처럼 경애왕이 자진한 것인지 참수당 한 것인지,아니면암살당한 것인지죽음의형태,시해의주범이 특정되지 않는다는점은되새겨볼 대목이다, 죽 음 의 장 소1)백제軍中(拘致軍中 븮삼국사기븯 권12신라본기12경애왕4년 11월조; 븮삼국유사븯 권2기이2김 부대왕조), 2)不明(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 한’). 3)포석정(‘弑王于鮑石亭’ 븮동사강목븯5하 경애왕 4년), 죽음의 시 기 견훤이 왕도에침입한 것에대해서는, 9월[븮고려사븯 권1세가1태조신 성대왕10년9월조), (븮고려사절요븯 태조10년9월조], 10월[븮삼국사기븯 권5 0 열전10 견훤], 11월[븮삼국사기븯 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조, 븮삼국유 사븯 기이2 김부대왕조]로 되어 있다. 등이 특정되지 않는 등, 상이, 혼선이있다. 경애왕 최후에 관한 한, 기록이 이처럼 난맥상을 보인다면 관련기록역시원점에서재검토해야하리라여겨진다. 우선,경애왕에 대한 시해는 일시적 분노로 행할 하극상,가 벼운 사안이 아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경애왕의 죽음을 놓 고 포착되는 신라 민심의 일단은 그를 짐작케 할, 단서가 된 다. 경애왕 사후 4년이 지난 931년, 고창의 토호 김행 등은 견 훤이경애왕을시해했다는소식을듣고무리에게의논했다. “ 븮동사강목븯5下 김부 4년 정월 21일조. 고창 지방의 민심이 경 애왕죽음으로 인해변화했음은븮승정원일기븯 영조2년병오(1726, 옹정46 월5일조),븮四佳文集븯卷5,安東權氏家譜序등에나타나고있다. 이 대목은 당시 신라 민심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고창의 민심은 경애왕을 죽였다고 알려진 견훤을 떠나 급속 히 왕건에게 쏠리면서 왕건은 전쟁에서 우세를 점하여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고, 후삼국 쟁패의 주도권을 점하게 되었다. 왕건이 고창을 가리켜 ‘동쪽을 평안하게 하였다’라는 ‘안동 (安東)’이라 한 것은 븮고려사븯권57 志11 地理2 경상도 안동부. 병가 필쟁(兵家必爭)의 땅을 점거, 감격에 겨운 왕건의 심사를 함 축하고있다고여겨진다. 이로써경애왕시해는항우의의제살해만큼커다란후폭풍 을 불러일으킬 불가역의 ‘블랙 홀’과 같은 주요 사안임을 견훤 이나,왕건모두인지하고있었다고여겨진다. 요컨대 경애왕 시해는 일시적 감정에 의해 이뤄질 사안이 아니었다.고창의전투는그것을실증하고있다. 또 하나 경애왕을 죽인 당사자로 지목된 견훤의 주장이다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 및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 후백제 견훤조에 공 히 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견훤은 분명 자신이 경애왕 을 죽이지 않았다고 강변하고 있다. 븮삼국사기븯기록대로라면 견훤은 경애왕을 죽인, 영락없는 살인의 피의자이다. 한데 살 인의 피의자인 견훤이 범행을 극력 부인, 항변하고 있는 셈이 다. 피의자 견훤이 동시대인인 왕건에게 자신의 범행을 부인 하며, 자신이 직접 경애왕을 죽이지 않았다고 설파하고 있는 점을그간누구도주목,청종하지않았다. 견훤의 3대 거악, 이른바 ①경애왕 시해, ②경애왕 왕비 겁 간, ③집단 윤간(비빈들을 대상으로 한)의 문제를 재검토할 여지가남겨지는셈이다. 그간 경애왕 죽음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가장 결정적 원 인은 관련 기록에 대한 엄밀한 접근 방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은 등가적, 획일적으로만 평가 되어 왔다. 그러한 까닭이 견훤의 항변을 주목하지 못하게 한 주된원인으로작용했다. 경애왕 죽음과 관련한 주된 기록은 네 갈래로서, ①견훤의 주장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및 븮삼국유사븯기이2 후백제 견훤조에 공히 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②왕건의 주장 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및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견훤조에공히인용된‘왕건 이 견훤에게 보낸 서한’, ③븮삼국사기븯 찬자의 주장 븮삼국사기븯에서 경애왕 죽음을 서술한 세 자료, 곧 ① 권12경애왕 4년조, ② 권12敬順王 史論, ③ 권50열전10견훤조,④븮삼국유사븯의 주장 븮삼국유사븯에서경 애왕 죽음을 서술한 세 자료, 곧 ① 김부 대왕조, ②김부 대왕 항목 말미 에붙어있는史論,③후백제견훤조등이다. ①, ②는 경애왕의 삶과 겹친 당대의 주장이다. ③은 경애왕 죽음으로부터 218년 뒤의 주장이다. ④는 경애왕 죽음으로부 터 약 354년 뒤의 주장이다. 기타 참고 자료로서 ⑤고려사(경 애왕 죽음에서 524년 뒤) 븮고려사븯권1세가1태조신성대왕3년-10년 조 , ⑥동사강목(경애왕 죽음에서 851년 뒤) 븮동사강목븯5하 경애 왕 및 김부 조 등의 기록이 있다. 이들 주장 간에는 상사(相似), 교집(交集),상충(相衝),첨삭(添削)이존재한다. 그중 ①,②가경애왕과 당대의 진술인만큼왜곡,첨삭에서 좀 더 자유롭고 동시대 육성에 가깝다.산삭(刪削),편집의 방 식으로 왜곡됐을 개연성은 있지만, 당시 실정을 가장 잘 알게 할 1차 사료,그나마 경애왕의 죽음을 구명할 ‘X파일’이라 감 히일컬을수있겠다. 경애왕 죽음과 관련한 모든 기록은 이제 등가(等價)의 시선 이 아닌 동시대성을 기준으로 분별,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 다고할것이다. 후삼국 시기라는 동란과 역변의 와중에서 왕건, 견훤이 서 한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음에 반하여, 경애왕 에게 자신의 심경과 입장을 전하는 서한이 남아있지 않음은 유감이다. 사서의 행간에서 침묵하고 있는 경애왕의 처지와 생각을 훑고 찾아낼 정황 자료로서,왕건,견훤의 서한에 대한 음미는각별한중요성을지녔다고여겨진다. 지금껏 동시대 기록에 가까운 견훤과 왕건 사이에 오간 편 지를 중심으로 하여, 경애왕의 죽음을 검토한 전작은 없었다. 이것은 경애왕의 죽음과 당시 상황을 파악할 가장 긴요한 자 료를누락했다는말과같다. 가-1)은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 가-2)는 왕건이 견훤 에게보낸답서의주요대목이다. 두 자료들은 븮삼국사기븯편찬자들의 포폄,첨삭,개서(改書) 등에서자유로운,이른바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은하되새로 이 창작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공자가 춘추를 지으면서 고수했던 집필의 원칙이었다.의 성격을 띠어 실상 1차 사료에 가깝다.따라서 당 시 사정을 더욱 자세히 짐작할 단서라 할 수 있다. 일연 역시 븮삼국유사븯기이2 후백제 견훤 조에서 거의 같은 내용을 전재 함으로써,1차 사료로서 매우 중요하게 인식했다. 븮삼국사기븯권5 0열전10견훤전에인용된‘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은336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는 693자이다. 반면 븮삼국유사븯기이2후백제 견훤전 에 인용된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은 330자,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는 719자이다. 두 책에 인용된 내용은 거의 相似하므로, 무시해도 좋을정도의차이점은나중살펴보기로 한다. 견훤의 서한 전문은 a)왕건의 서라벌 방문, b)견훤의 설유 와 경애왕 훙변, c) 김부의 옹립과 再造의 공, d)왕건과의 전 투 勝果, e) 휴전을 촉구한 오월의 교서, f) 존왕의 대의와 진 정,왕건과의휴전촉구등으로짜여있다 왕건의 답서는 a)오월의 교서에 대한 감상, b)휴전을 깨트 린 견훤의 허물, c)견훤의 6대 죄악, d) 견훤과의 전투 勝果, e)오월의교서에의거한휴전결의등으로요약된다 왕건과 견훤,둘 다의 서한에선 중국의 일개 지방 정권에 불 과한 오월 왕에 대한 비중이 높은 셈인데, 견훤 서한의 거의 절반의 분량이 오월 왕의 교서에 입각해 있고, 왕건은 견훤이 오월 왕을 두 차례 언급한 것에 비해, 서한의 首尾에 걸쳐 3번 이나언급하고있다. 이에서 경애왕 죽음 직후 왕건과 견훤은 민심의 향배를 염 두에 둔 치열한 명분 다툼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견훤이 자신 을 칭하는 은유(새매, 사냥개, 조개, 조적, 한금호), 왕건을 칭 한 은유(작은 자라, 종달새, 토끼, 도요새), 신라를 칭한 은유 (큰 자라) 등 8종의 금수와 2명의 인물을 거론하며 자신의 입 장을 극력 강변했다면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서한’,왕건은 자신을 칭하는 은유(큰매,개, 말, 범,용,수 레바퀴, 산, 번개, 벼락), 견훤을 칭하는 은유(사마귀, 모기, 벌, 전갈, 이리, 호랑이, 경짐승, 올빼미, 새매, 왕망, 동탁, 걸 왕,주왕)등 14종의 금수 및 벌레와 4명의 악인,4종의 자연물 등 등 갑절을 넘는 대상을 총망라,상대와의 격렬한 명분 다툼 을 하 고 있 다 .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 서’ 한편 경애왕 죽음과 관련,견훤은 당시 세간에 떠도는 말을 유언(流言,떠도는 말)이라 천명하고 있다 븮徒聽流言븯(븮삼국사기븯 권50열전10견훤‘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 견훤이왕건을향하여자세한충고에도왕건이진위를깨닫 지 못하고 있다고 한 발언에서,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하여 견 훤은 이미 여러 차례 당시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도 보인다. “勿詳忠告”(븮삼국사기븯권50열전10견훤‘견훤이 왕건에게보낸서한’). 눈여겨 볼 대목은 왕건이 경애왕 죽음 직후 조사(弔使)를 보내었고, 그 이후의 어느 시점에서 직접 거병, 친정하였다는 것이다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순왕 원년조, 븮고려사븯 세가1 태조 신성대왕10년 9월조. 조사 파견 거병과 친정의 순서는 주목되는 대목이다. 왕건의 말처럼 존주(尊主, 임금을 높임)의 진정을 지녔다면 왕건은 거병과 친정 조제의 순서로 이뤄져야 옳다. 왜 왕건은 경애왕의 죽음 직전에도, 죽음 직후에도 즉각 거병 하지 않았으며, 죽음 이후에조차도 조사를 먼저 파견한 것일 까. 왕건이 보낸 조사는 비밀리 파견한 것일 리 없으며, 흰 천 을 머리와 몸에 두르고 조기(弔旗)를 말에 꼽고 경애왕 시해 를 온 천하에 공포, 견훤의 죄악상을 팔방에 퍼뜨리며 내려왔 을 것이 틀림없다. 조사의 행로는 송악 서라벌까지 요소요소 를 거치는 만큼, 지방 세력의 동향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고보인다. 왕건의 조사 파견은 이에 경애왕 시해의 책임을 견훤에 씌 우고 민심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려는 고도의 포석이었음이 확실하다. 동시에 경애왕의 죽음 직전 철저히 방관적 자세를 취했던 왕건이, 경애왕 죽음 이후에도 고도의 전략을 구사하 며승세를얻을기회를엿보았음이확인되는것이기도하다. 주목할 것은 견훤과 왕건이 오월의 조서를 언급하며 공히 청종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견훤은 이 미 900년, 918년에 오월의 전륙에게 견사하였고 븮삼국사기븯 권5 0 열전10 견훤 , 9 2 7 년 1 2 월 견 훤 은 오 월 의 왕 이 왕 건 에 게 도 사 신과 조서를 보낸 것을 알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심지어 909 년에도 견훤이 오월에 견사했는데 왕건이 사절 일행을 포획 하여 궁예에게 바친 적도 있었다븮고려사븯 권1세가1태조신성대왕 909년조 이러한전력으로보아견훤과오월과의친선관계는확인되 며, 927년 경애왕 죽음 직전 아니면 직후에 오월에 사신을 보 내 자신의 입장을 적극 피력했다고 보인다 견훤은927년11월7일 오월의 사신이 조서를 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경우 경애왕 죽음 직전 견훤은대외적분위기조성에나선셈이 된다. 왕건은 909년 견훤의 오월 견사 사절을 납치한 전력뿐만 아 니라, 919년에는 오월에서 내투한 문사(文士) 추언규(酋彦 規)를 받아들였고 븮고려사븯 권1 세가1 태조 신성대왕 2년 9월조, 9 2 3 년에는 문사(文士) 박암(朴巖)을 받아들였기에 븮고려사븯 권1 세 가1태조신성대왕6년6월조 오월의 입장에선 껄끄러운 번국에 속 했다고 여겨진다. 사실 왕건과 오월 사이에는 이전의 외교적 접촉이 포착되지 않는다. 까닭에 반상서가 조서를 가지고 온 사실의 이면에도 왕건이 아닌 견훤의 적극적 외교 노력이 작 용하고있지않은가여겨진다. 견훤이 왕건에게 서한을 보낸 927년 12월 즈음은 견훤이 동 수(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군대를 괴멸시킨 직후였으며, 외 교전에서 오월의 적극적 후원을 받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 다 . 결국 견훤이 왕건과의 대결에서 외교적, 군사적 대결에서 승리하고, 경애왕 죽음에 대한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서한 을 보내었던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반면 왕건은 견훤이 행한 누차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모두 벗기 어렵다븮難遣嫌疑 븯(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며 맞서고 있다. 견훤과 왕건은 경애왕의 죽음을 두고 숨바꼭질 같은 진실 게임을 펼치고 있어 자뭇 진위를 구별하기 힘든 실정이다. 이 로써 견훤의 경애왕 시해는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견훤 의 말대로라면 허무맹랑한 유언(流言)이며, 왕건의 말대로는 특정할 수 없는 ‘혐의’에 불과함이 자명해진다.견훤의 편지에 서 보이는 ‘유언’,왕건의 편지에서 보이는 ‘혐의’는 이런 대목 을 잘 보여준다. ‘유언’은 순전한 허구, ‘혐의’는 진실일 수도 아닐수도있으되불명함을함의한다. 경애왕의 포석정 유행, 혹은 주연이 세간에 널리 회자되어 왔다. 한데 경애왕과 동시대인인 견훤, 왕건의 서한에서는 포 석정의주연(酒宴)은공히언급조차없다. 특히 왕건은 견훤의 죄상을 공박하는 가운데 경애왕 죽음 직전의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 屋震驚.”(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 왕 건 스스로도 피력할 만큼 서라벌은 927년 당시 견훤의 침략 위협으로군핍했다.견훤의친정으로말미암아서라벌이그처 럼 어수선하고 군핍했고 1분 1초조차 민첩한 대응이 아쉬운, 비상한 상황이 임박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존왕의 뜻이 간절 하여 견마지로를 다하겠다는 맹서 “以僕心無匿惡,志切尊王, 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 ”(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 게 보낸 답서’) 를 입에 달고, 황옥을 일컬으며 경애왕을 지존, 천 자처럼 여긴 수사(修辭)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 驚.”(븮삼국사기븯 권50 열전10 견훤 ‘왕건이 견훤에게 보낸 답서’)와 달리, 왕건은 즉각 친정에 나서지 않았다. 왕건의 심각한 자기 부정 이엿보이는대목이다. ‘견훤의 친정(親征)=심각한 위협의 도래’임에도 경애왕이 구원 요청을 할 때까지 왕건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븮삼국사기 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4년 9월조, 븮고려사븯 1卷 世家1 太祖1 10년(927) 9월조자체부터 왕건의 뚜렷한 방관을 드러낸다.견훤의 공세, 왕건의 방관, 신라 내 반대세력의 준동 등이 목전에 펼쳐지는 당시 상황은 경애왕에게 있어 사면초가의 시간이었다. 우민 (憂悶)에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지만, 잠을 자되 편안히 자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되 그 맛을 모르고 아름다운 미 녀들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종과 북의 아름다운 소리 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위기의 시간이었다. 언필칭 격랑 의 시대, 백척간두의 자락에서 경애왕의 포석정 주연이 불가 했음은의심의여지가없다. 전쟁과 견훤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던 경애왕이었다. 경애왕이수차에걸쳐전쟁과관련한주문을한것이나븮삼국사 기븯 권12신라본기12경애왕 3년 4월조, 븮고려사븯1卷 世家1 太祖1 10년(92 7) 정월조, 견훤을 향한 판단력이 고려의 전설적 무장 유금필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점 븮삼국사기븯권12 신라본기12 경애왕 2년 11월 조,븮고려사븯卷92列傳卷5諸臣 유금필은 무시할 수없는 대목이다. 동시에 그런 섬세한 촉각을 지닌 경애왕이 최고조 위험의 순 간,도처에 도사린 불확실성,생존의 문제를 앞에 두고 태연하 게 주연을 베풀며 흥청거렸다는 것은 심각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경애왕 치세를 통틀어 경애왕이 사망한 927년은 왕건과 견훤 사이, 유독 휴전이 없었다. 말하자면 927년은 살 벌한 한 해였다. 924년 휴전(븮고려사븯1卷 世家1太祖17년(924) 8월조), 925년 휴전(븮고려사븯1卷 世家1 太祖1 8년(925) 10월조), 926년 휴전(븮고려 사븯1卷世家1太祖19년(924) 4월조). 견훤은 큰 돼지와 이리가 되어 사방에서 신라를 먹어 들어오는 형국이었고, 왕건은 경애왕 의 구원 요청을 교묘히 거부하며 긴 뱀처럼 교활하게 사세를 방관하는형국이었다.어찌하여경애왕은자신의목숨이경각 에 달린 상황에서 거나한 술판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것인지 이 해할수없다. 왕 건 은 견 훤 에 게 보 낸 서 한 에 서 , 견 훤 이 ‘이 리 와 호 랑 이 ’처 럼 서라벌을 압박하자, 경애왕의 어가가 크게 놀랐다고 하였 다.경애왕과관련되어나타나는 황옥(黃屋)은 노란비단으로 싼천자의수레덮개로서븮史記集解븯에인용된蔡邕의말에따르면,황 색의비단으로 속을 만든수레덮개를말하며, 좌독과 함께 漢代에는 황제 만이사용할수있는거마장식으로황제의의례를상징한다고한다. (국편 위 역주, 븮前漢書븯 卷95 서남이양월조선전 第65 南 쬐 ) , 수레의 왼쪽에 꽂은 큰 깃발 좌독(左纛)과 더불어 이동이 전제된 수레를 함 의한다. 당시 경애왕이 최후의 순간, 견훤의 압박 작전에 밀려 모처 로의 이동을 도모했을 개연성을 보인다. 왜냐하면 황옥이 나 타나는 제 기록에서 황옥은 정지의 개념이 아니라 운동의 개 념과관련하여사용되고있기때문이다븮史記븯卷5秦本紀第5의자 영,븮史記븯卷7項羽本紀第7紀信,븮史記븯卷113南越列傳第53의尉 등은 군신을 대동하고 움직이거나, 주군을 대신해 적을 기만하거나, 군세를 결 집시키는등의목적을위해황옥을탔음이드러난다.븮三國志븯魏志卷30위 지오환선비동이전에도원소가오환의3왕에게황옥과좌독을하사했음이 발견되고있다 .927년 당시 경애왕이 정좌하여 질펀한 잔치를 벌 인 것이 아니라, 부단한, 장거리 이동을 위해 모종의 조치를 행하고있었다고파악할대목이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비정(10) 뱚Ⅰ.927년경애왕의 죽음과 기록의 의문 박 순 교 뱚Ⅱ.신라의민심과견훤의항변 뱚Ⅲ.경애왕죽음의의문을풀핵심전거 뱚Ⅳ.견훤의편지,왕건의편지 박 순 교 뱚Ⅴ경애왕의‘포석정술자리’는명백한허구 뱚▶다음호에계속 목 차 Ⅰ.927년경애왕의죽음과기록의의문 Ⅱ.신라의민심과견훤의항변 Ⅲ.경애왕죽음의의문을풀핵심전거 Ⅳ. 견훤 의 편 지 , 왕건의 편 지 . Ⅴ.경애왕의‘포석정술자리’는명백한허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