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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諱瑞煇 字子謙 初諱大受 姓朴氏 新羅密城大君爲始祖 高麗太師 諱彦孚 侍中 平章事 文翼公諱孝臣 判圖判書 文憲公諱永均 皆重封密城 是其中祖 中書令 忠肅公 諱天翊 罔僕我朝 歸密州 號松隱 是生 諱聰 吏參 號拙堂 移居三嘉 公五世祖也 曰 泰仁縣監諱熙文 判事諱彦林 兵使諱芸 判事諱士信 是其四世也 妣碧瑨李氏 進士水南之女 公自少 才氣超邁 有智略 補海南縣監 旋移平營虞候 壬辰亂 方奉老家食宜寧 痛無路西覲 遂入本邑鄕射堂 撫安人心 收散卒 設伏鼎津 殺賊獲劒三 賊乍却 仍與郭忘憂再佑 金松菴沔 登嘉禮洞之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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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서휘이며 자는 자겸으로 어릴 때, 이름은 대수이다. 성은 박씨이다. 신라 밀성대군을 시조로 하여 고려 태사 휘 언부는 시중과 평장사를 지냈고 문익공 휘 효신은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문헌공 휘 영균은 다 밀성대군으로 봉해지시니 그 중시조이다. 중서령을 지낸 충숙공휘 천익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하면서 밀주로 귀향하니 호는 송은이다. 그 아들 휘 총은 이조참판으로 호는 졸당이며 삼가로 이거하니 공의 5세조가 된다. 이어서 태인 현감 휘 희문과 판사를 지낸 휘 언림과 병사를 역임한 휘 운과 판사를 지낸 휘 사신은 곧 4세에 해당된다. 배는 벽진 이씨로 진사를 지낸 수남의 딸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재주와 용기가 뛰어나고 지략이 있어서 해남 현감을 역임하고 이어서 평안도 우후로 자리를 옮기었다. 임진왜란에 노부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곳이 의령이었으므로 받들어 옮길 방도가 없음을 괴로워하면서 마침내 본읍의 향사당에 들어가서 인심을 어루만져 안정시키고 흩어진 병졸을 모아 정암진에 매복하여 적을 죽이고 칼 석 자루를 빼앗으니 적들이 잠간 사이에 물러가고 말았다. 이어서 곽망우당 재우와 김송암 면으로 가례동의 야대에 올라 피를 나누어 마시며 함께 맹서하였다. 또 고금정에 모여서 시를 지어 맹서하기를「마음으로 어찌 임금을 속일 것인가. 흰 달이 하늘 가운데 밝게 비춘다.」 하였다. 공훈에 보답함에 공은 자리 차지하는 일에만 연연하지 않고 고을 현감에 임명을 받고 맹부에 오르기만 하였다. 광해군 때, 변방의 일개 무인으로 등용되는 것에 뜻이 없어 관헌에 나아가서 퇴휴라고 하여 사퇴하는 글을 남기고 휘파람 불면서 마음 내키는 데로 유유하게 생활하니 사람들이 모두 높게 우러러 보았다. 계유년 7월2일날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였다. 묘는 의령현 칠곡리 초연동 서쪽 언덕 선친의 묘소 아래 남쪽이다. 배는 전주 전씨로 수족당 양의 딸인데 묘는 오른 쪽 언덕 계좌이다. 후배는 전의 이씨로 충순위 득무의 딸이다. 묘는 의령현 덕곡리 이목촌 뒤 건좌인데 정축년 청명절에 공의 묘 왼쪽으로 이장하였다. 아들 근은 별제요, 류는 첨정이요, 진은 선교랑이요, 경은 부사과요 ,호는 전연 사직장이요, 환은 부사과이다, 사위는 이성로 윤사증이다. 근의 아들은 이환 이욱이요, 류의 아들은 이엽으로 사위는 하달천 양진세 조명규이다. 진의 아들은 이형이며 사위는 주남승 정유언이며 경의 아들은 판관을 지낸 이렴과 이현, 이위 ,이정이다, 호의 아들은 이검이요 환의 아들은 이성이다. 증손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하루는 공의 8세손 응화, 9세손 희흠과 희열이 그 아들과 조카 희보와 희상을 보내어 묘갈명을 청하여 온 즉, 아! 나는 미련한 사람인지라. 보고 듣는 것만 기록하는 것도 얻을 것이 없는데도 하물며 삼백 년의 멀고 아득한 일을 어찌 추측만 하여 바르게 기록하겠는가. 비록 집안의 노복일지라도 두렵지 않겠는가. 그러하나 그 행장을 살펴보니 읍지와 김송암 일록에 이미 삼가 서술되어 있는지라. 그 찬란한 업적이 집안 사정으로 민멸되어 없어지므로 빠진 글을 보충하고자 하는 것은 삼가 두려운 일이기도 하나 한편 생각해보면, 나의 선조 문순공이 공의 조부인 병사공 수성제와는 동서지간(처숙질간)으로 가례동천에 세긴 네 글자가 뚜렷하게 남아 있음에랴! 감히 유문이 적고 먼 것을 핑계삼지 못하고 간절한 정에 의하여 행장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서술하면서 명하노라. 명하되, 벼슬 버리고 시골에 묻혀 살지만 떨친 용맹 엄정하여 맑게 사는 한 야인으로 만족하도다. 남쪽 고을 맡았다가 잠시 서영으로 옮기었지만 앞선 날 전쟁에서 공이 있었네 시승이 가야산 꽃 아름다움을 이기지 못하여 수풀아래 돌아와 서로 대면하더니 삼세의 인연이요 섬김은 하나임을 후생에게 경계하더라 고종 35년 무술 중추에 통정대부 전 승정원 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진성 이만도 삼가 씀. 부쳐 기술하니, 배 숙부인 전의 이씨의 옛날 묘가 산이 험난하여 수호하기가 불편한 관계로 정축년(1988년) 청명에 공의 묘소 왼쪽에 이장하고 겸하여 공의 묘비가 낡아서 글자가 마멸되므로 인하여 후록에 위치한 공의 아버지 묘비와 함께 돌을 바꾸어 다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 입석자 일동. 정축년 청명절에 경주 김경옥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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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및 번역 출처 : <A href=http://m.blog.daum.net/mook11/7088940?categoryId=3 target=_blank>석정石亭블로그</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