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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박씨 양세 제단비명 및 서문 우리나라 묘사의 예절이 어느 시대에 비롯되였는지는 모르되 그 유래가 오래 되였은즉 묘소를 잃고 설단하는것이 비록 예전의 예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신의 이치와 사람의 정의에 합당한즉 이 또한 예절이니 어찌 불가함이 있으리오. 팔계 의 다라촌은 밀양박씨 세거이다. 그 선조 봉사공 번(番)과 그 배위 안악이씨와 그 아들 감찰공 정근(禎根)과 그 배위 경주김씨 양대의 분묘가 본골에 있는것을 묘지기의 불근으로 아득히 실전하여 향화를 받들곳이 없는고로 중년에 문중 부로을이 부소산 직장공 묘소위에 땅을 제하여 작은 단소를 만들고 단갈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씩 제사를 모시고 왔으나 가묘가 너무 작아서 마음이 심히 불안 하더니 금년 봄에 후손 덕길(德吉)과 충묵(忠黙)과 중구(重ㅁ)와 중소(重昭)가 종종 중달(重達)과 더불어 상의하고 각기 성금을 갹출하여 종실 계영정 곁에 넓은 단소를 옮기고 다 시 여섯자 용주 국식으로 만든 새 비석을 갖추어 단소 위에 세울새 후손 동원(東源)과 용묵(容黙)과 상휴(相烋) 가 그 가승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명을 청하거늘 내가 그 추원하는 정성에 감동하여 사양치 아니하고 쓰되 박씨가 시조왕이신 혁거세가 나라를 세움으로부터 지금까지 이천여년에 왕손이 전국에 대개 팔파가 있으되 밀양씨는 고려시중 도평의사 밀성부원군 언부(彦孚)로 중조로하여 아들 효신(孝臣)은 문하평장사요 육경(育慶)과 태화(太和)와 영균( 永均)은 모두 상서요 익(翊)은 중서령이요 호는 송은이니 여말 팔은중의 한분이시다. 이조에 와서 총(聰)은 정랑이 요 단성 신계원에 입향하니 봉사공의 중조이다. 조부는 승문(承文)이요 호는 두촌이니 참봉이요 선고는 서림(書林)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