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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9월30일 토요일 9 (제129호) 종합 박 종 부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욾 테니스엘보는 팔꿈치 과사용 증후군 의 일종입니다.팔꿈치 관절과 팔에 무리 한힘이주어져팔꿈치관절에통증이생 기는질환으로,테니스를많이치는사람 에게 주로 나타난다 하여 테니스엘보라 이름 붙여졌지만 꼭 테니스 치는 사람에 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손목과 팔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집 안일을 많이 하는 주부나 컴퓨터를 많이 하는사람,또는팔을많이쓰는배드민턴 선수 등에도 많이 발병합니다.이것은 손 상부위 인대에 미세한 파열이 생겨 통증 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테니스엘보는 팔 꿈치에서 손목으로 이어진 뼈를 둘러싼 인대가 부분적으로 파열되거나 염증이 생겨 발생 합니다.이것은한번의 충격으 로생기는것이아니고작은충격이반복 되면서그충격이쌓여서서히통증이생 깁니다.(질병백과참조) 테니스 엘보우는 빈번한 팔꿈치 통증, 곧 팔과 손의 움직에 따른 통증으로 인해 일상 생활에 상당한 제한을 받습니다. 그 러나테니스나배드민턴같은운동을하지 않는사람들도자주테니스엘보우를앓게 되는데이는과도하게쓰는것만이문제가 아닌팔꿈치관절이약해져있고긴장되어 있는 사람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 포츠하는분들은운동이유발요인이되어 쉽게엘보우손상을가져오겠지만기본적 인 것은 엘보우가 약한 사람이 다친 다는 데있습니다.인체파동원리에따라말한다 면 오작동의 힘이 있는 곳 즉 긴장되고 수 축되고 압박 받고 있는 곳은 조그만 충격 이 가해져도 쉽게 손상이 온다 라고 말할 수있습니다. 그러면 왜 엘보우가 약해 졌을 까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었일까요 ? 답은 이 렇습니다. 좌우 엘보우가 원인이 다르 겠지만 아주 다양한 원인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는 원인은 위장입니 다. 소화가 안되고 속이 쓰리며 가슴이 더부룩한 사람한테서 테니스 엘보우가 잘 발생합니다. 식사를 하고 소화가 돼 지도않은상태에서테니스나배드민턴 을 친다면 아주 테니스 엘보우 손상이 오기 쉽겠지요. 간이나 심장이 좋지 않 으신 분들도 잘 발생합니다. 더불어 위 장을 힘들게 하는 모든 상황들은 엘보 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엘보우 는인체파동원리로볼때경추7번,흉추 1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경추7번이 나 흉추1번를 긴장하게 하는 모든 상황 들은 테니스 엘보우를 유발할 수 있습 니다. 엄청나게 많습니다 예를 들어 허 리가 아파도 목이 아파도 테니스 엘보 우가 올 수 있으면 자궁이 좋지 않아도 장이 좋지 않아도 심지어 발목이 접질 렸을 때도 올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정 확한진단이선행되어야최 대한의치료 효 과 를 볼 수 있 습니다. 병의원에가면 마취제와 약간의스테 로이드를혼합하여엘보우에점적주사 합니다. 왜냐하면 기본개념이 인대의 국소적염증으로테니스엘보우가발병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항염증을 위해 스테로이드와 통증을 위해 리도케인이 라는 국소 마취제를 사용합니다. 치료 효과는금방나타나지만머지않아재발 합니다.근원이치료되지않았기때문입 니다.또한 스테로이드의 빈번한 사용은 다른합병증들을가져오기때문에자제 하는것이좋습니다.인체파동원리에따 른 치료는 근본적인 시작 부위를 찾아 오작동의 힘을 파동원리적으로 치료하 고 테니스 엘 보우에 대응 하는 곳을 치 료하면 바로 깨끗하게 치 료 됩 니 다 . 몇 차 례 만 치 료해도 통증 에서 해방될 수있습니다. 테니스엘보우 의 학 상 식 ※자료제공:인체파동원리창안자박종부 문의:010-2336-7582 ■蘆江 先生의 漢字 이야기 蘆江 朴 來 鎬 ▲全南長城出生 ▲본보자문위원 ▲長城筆巖書院선비학당학장 ▲성균관부관장 自 作 碑 銘 (자작비명) 자신이본인의묘비명을지었다는뜻. 퇴계께서는1570년 12월 어느 날 조카 영 (寗)을 불러 유언으로 나의 묘비석을 쓰지 말고작은돌에다가벼슬과이력은모두기 록하지 말고 다만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쓰고뒷면에는 선조의 내력을 간단히 쓴 다음 내가 지 어놓 은명(銘)을쓰라고당부했다.다른사람에 게부탁하면고봉기대승같은사람이진실 로없었던일도장황하게쓸염려가있으므 로 남에게는 맡기지 말라고 하셨다. 그 비 명(碑銘)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품은 뜻을 누가 믿으며, 나의 감패(感佩) 누가 알리, 내가 사모하는 옛 성현의 마음, 진실로 내 마음과부합하더구나,오는세상을어찌알 리오, 현실에도 얻은 것이 없거늘, 근심 속 에서도즐거움있고,즐거움속에도근심이 있었네, 자연대로 살다가 돌아가노니, 이 세상에 무엇을 다시 구하리. (我懷伊阻 我 佩誰玩 我思古人 實獲我心 寧知來世 不獲 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 兮)라고되었다. 필자는 17일 장성향교 문영수 전교 정희 권 유도회지회장 공영갑 문화원장 등 유림 42인과 1박2일 영남지역 문화 탐방 길에 올 랐다. 하회마을 이곳저곳을 두루 살펴보고 병산서원을 경유 근처에서 오찬을 마친 뒤 도산서원에도착하였다.김병일원장을비 롯원임여러분들이유복을갖추고우리일 행을 맞아주었고, 알묘(謁廟)례를 마치 후 선비문화수련원으로 자리를 옮겨 김병일 원장에게 퇴 계선생의 삶에 대해 한 시간 강 의를 들었다. 김 원장의 모습은 마치 청량 산에서 방금 내려온 신선이 퇴계선생 강의 를 하신 모습인 듯 하였으며 강의 내용은 만인의 롤 모델 퇴계와 어머니라는 주제를 비롯 청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우리에 게절실한퇴계의소원은좋은사람이많아 야한다는것으로깊은감명을주는강의였 다.18시에국학진흥원으로자리를옮겨만 찬을 마치고 숙소에 들었다.18일 7시 조반 후안동댐하류월영교에도착했는데그경 치는 한번쯤 거닐어 볼 만 하였다. 곧바로 고성 이씨 임청각에 들렸는데 사단법인 국 무령 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이항중 님의 환영과 설명이 있었다. 그 설명에 의 하면 임청각(臨淸閣)은 본래 99칸 건물이 었는데 일정시대 독립운동의 산실이라 하 여마을의정기를끊기위해일부러절반을 허물고기차철로를만들었다는것이다.지 난번대선당시문재인후보가임청각에와 서 대선출마를 선언함과 동시 대통령이 되 면 임청각을 완전 복원하겠다고 약속도 하 였다는 것이다. 대청 높은 곳에 목판 한편 이 걸려 있기에 물어 본 즉 전라도 광주출 신 제봉 고경명선생이 동래부사 임기를 마 치고돌아가는길에들려휴식을하면서남 긴한시를새겨걸었다고하기에일어나현 판 앞에 머리 숙여 경 의를 갖추었다 알고 보니 선생의 큰 자부의 친정이 임청각이라 는 것이다. 이항중 님이 나에게 특별히 내 어 준 동구유고(東邱遺稿)집에 기재된 안 동대 김희곤 교수가 쓴 독립운동 3대의 한 복판에서 민족의 정의를 세운 기록이라는 논문을 열람하다가 동구 선생의 고모부인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번개마을(일명 번 포)무안박씨종손박경종(朴慶鍾)님의망 명활동을 펼쳤다는 기록은 필자의 마음을 기쁘게하는감정을주기도하였다.11시경 경주에있는회재이언적선생의위패를모 신 옥산서원에 도착하여 도유사 서영조님 의 인도를 받아 봉심을 할 수 있었 으며 서 원을감아흐르고있는시내를중심으로깔 려 있거나 놓여있는 암반석은 감탄을 자아 낼만하기도하였다.근처식당에서오찬을 마치고경주향교를찾아성균관유도회경 주지회장 서만평님의 협조를 받아 알묘를 마쳤는데 경주향교 역시 성균관과 같이 문 묘(文廟)가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어 그 규모는 대단하기만 하였다 계획된 답사 를 마치고 출발하는 장소에서 고광춘 회장 의 소개로 박선희(朴仙喜)라는 종친을 만 나잠시동족의정을나누기도하였다.그러 나 경주까지 와서 시조 왕을 모신 숭덕전과 오릉을 참배하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번 답사에서 많은 느낌을 받은 곳은 선비 문화수련원이었다 요즈음 물질풍부 시대를 들여다보면 자신을 홍보하는 것 은 물론 없는 것으로 꾸며 조상의 묘역을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이러한 풍조는 퇴 계선생의 유언과 과장이 두려워 자신이 쓴묘비명에서바꿔져야한다는것이다. 이번답사준비에있어이충원사무국장 고광춘회장두분의노력에감사드린다. 創契於焉甲週年(창계어언갑주년) 창계한지어언육십년이되었네 先儒敬慕設詩筵(선유경모설시연) 선유를경모하여시의자리베풀었네 以文會友修良性(이문회우수양성) 글로써벗을모아좋은성품수양하고 與德留仁結好緣(여덕유인결호연) 덕과인이머물러서좋은인연맺었네 文院講聲無極續(문원강성무극속) 문화원의강한소리끝없이이어지고 春樓詠氣不休連(춘루영기불휴연) 춘풍루읊은기운쉬지않고이어지네 藍田古事奚專美(람전고사해전미) 남전의고사가아름다움뿐이리오 旦願此遊後輩傳(단원차유후배전) 다만즐거운이놀이가후배에전해지길원하네 回顧創契六十年 (회고창계육십년) 葛田 朴聖根 아무도찾아오지않아도 나 여 기 뿌 리 를 뻗 고 여윈몸을부대끼며살아온이땅 이 터 가 좋 아 여린뿌리뻗을한뼘터가있어 모양새가리지않고그냥꽃피우고 씨를맺어이터에다시떨구며 우리끼리어우러져살아가면되니까 때때로산들바람이불어와 푸른향기를날려보내고 그바람을따라드러누우면 두눈가득담기는푸른하늘 나 는 이 땅 이 좋 아 누구도탐내지않고 누구도불평하지않는 메 마 른 이 땅 이 좋 아 잡초의땅 박형동 경북 성주군 수륜면 오천마을 앞 도로 변에 세워진 정려는 정부인 고령박씨의 효열을 기린 곳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에 게효(孝)사상을고취하고있다. 열부(烈婦)인 박씨는 고령인 인서(麟 瑞)의 따님으로 참판에 증직된 순천박씨 시평(始平)에게 출가하였다. 부인은 규 범(規範)이 정숙하고 시부모를 섬길 때 온갖 효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부군을 대 할 때도 여성이 익히고 따라야 할 도리나 덕목을잘지키었다. 부인이 울주의 80세 된 노모에게 근친 (覲親)하고 있을 때 부군이 성주의 본가 에서 갑자기 병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 고 열화같이 달려오던 중 작고(作故)하 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부인은 호곡 을 하며 누차 기절을 반복하면서 집에 도 착한 후 초빈(草殯)과 염 등을 아무 여한 없이잘치루었다. 그리고 입관(入棺)을 마친 후에는 자 리에 누워 일어나지 목하고 8일 동안 음 식을 먹지 못하여 자진하기에 이렀음으 로 이웃마을 사람들은 서로 칭찬하고 도 내 유림들은 모두 감동하여 누차 본영 및 본 읍 에 천 장 (薦 狀 ) 을 올 렸 는 데 그 후 경 종 갑자년(1724) 7월에 관찰사 김동필이 장계를 올리고 예조판서 문충공 민진원 이 박씨의 정렬(貞烈)은 정표(旌表)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다 시 아뢰자 임금은 이를 윤허하였다. 그리 고 그 다음해 정표의 은전이 내려졌다.이 보다 앞서 1719년 송강정철의 4대손으로 시문이 뛰어나고 영의정에 오른 정호(鄭 澔,1748~1736)의 박씨행록후발(朴氏行 錄後跋)과 조선후기의 학자로 좌의정에 오른 권상하(權尙夏, 1641~1721) 글씨의 열녀 박씨행록후기(朴氏行錄後記)가 전 해진다. 열녀의 부군 시평(始平)은 아들이 귀 (貴)하게 됨으로서 증 가선대부 형조참 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에증직되었다. 선계(先系)를 보면 고려에서 정승을 지낸 영규(英規)를 시조로 하고 그 후 누 대를 지나 숙정(淑貞)은 대제학을 지냈 으며,2代를 지나 천상(天祥)은 평양부원 군을 지내고, 이분의 아드님은 고려가 망 하자 가야산에 은둔하여 불사이군의 충 절을 보여 덕봉서원에 배향된 판윤공 휘 가권으로8대조이다. 아버지 휘 신은 호조참의에 증직되었 으며, 어머니는 한양조씨 승경의 따님으 로 다섯째 중 넷째로 1656년에 태어났다. 형제간에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부모 를 섬 길 때 는 성 의 를 다 하 여 무 슨 일 을 시 키기 전에 먼저 이행을 하여 조금도 부모 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그 를효동(孝童)으로칭하였다. 하루는과거를보러갔다가많은선비들 이 서로 경쟁하는 것을 보고 과거공부를 폐지하고 오로지 수 신(修身)하는 학문에 만 전념하였다. 이때 문충공 민진원이 성 주로 유배되어 공(公)은 숙형(叔兄)과 함 께 자 주 가 서 뵈 오 며 경 의 (經 義 )를 강 론 하였으므로교분(交分)이매우두터웠고, 그후사면될때는그고을경계까지전송 을나가특별한사랑을받았다. 그리고 평일에도 새벽에 일어나 의관 (衣冠)을 정재하여 지신(持身)을 근엄하 게 하였으며, 또 선조의 사당을 건립하여 온갖 성의를 다하였고 종족을 대할 때도 화목하게 하고 남을 대할 때도 화기롭게 하여 한 결 같이 충(忠) 신(信)과 경의 (敬意)로 일관하였으므로 그 고을 친구 들은 모두 감복하여 공의 덕망을 칭송하 여 열부(烈婦) 고령박씨와 함께 효(孝) 와 열(烈)의 모범을 보인 것이기에 더욱 돋보인다. ■효열부열전븣 순천박씨판윤공 종중의정부인고령박씨 “종사(宗事)에 남긴 업적(業績)은 가 히 태산만큼 높고 커 후세의 표본이 되었 으니 가히 우러러 흠모할 따름이다. 이에 종중의 간청이 있어 이와 같은 사실을 엮 어 이 碑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후세의 사 람들은 公의 타고난 봉사와 희생정신을 계승하여 기릴 것을 간절히 바라노라”공 적 비문의 일부로 후인들의 자세 또한 아 름다운대물림으로이어질것같다. 밀성박씨 무은공종중 숭공단 건립 제 막식이 지난 23일 오전 11시 전북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곡촌부락에서 지역 유림 과 기관단체장, 종원 등 150여명이 참석 한가운데개최되었다. 이날 제막식은 무은공 선조의 부조묘 와 가전고문서가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풍양사) 제155호, 147호로 각각 지정되 는데 공헌하고 종중의 체계를 세우면서 후손들에게 모범을 보여준 송암공 휘 중 석,성암공 휘 종석,휴천공 휘 순령,효천 화석 회장(현 좌상공파대종회장) 등 4기 의 공적비를 세우고 헌성비와 함께 준공 식을겸하였다. 숭공단 건립추진위원회 순옥 회장은 이날 기념사를 통해 공적비 건립을 처음 제안하였는데 이렇게 큰 성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종중 일을 진행하는 데는 협조하고 단결하면 못할 일이 없다 생각이라며 감사에 인사 를거듭전했다. 노강 박래호 선생은 피는 물보다 진하 다는 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오늘 이 자리는 종원들의 힘과 정신과 그 마음이 모여 오늘 하나의 역사를 만드는 현장이 되어 훗날 우리들의 새싹들에게 교육 현 장의역사를만들어냈다며축하하였다. 본보 상섭 편집국장(좌상공대종회 총 무)는 축사를 통해 갈수록 희박해지는 뿌 리 의 개 념 은 이 제 도 를 지 나 친 것 같 아 종 중일을 보아온 한 사람으로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으로 이제 우리 사회는 정이 메마르고, 인성부재에 의한 크고 작 은 사건이 우리 아이들에 의해 빈번하게 발생되는 이때에 묵묵히 위선 사업에 매 진하고 종중의 체계를 세워온 선대 어른 의 공적비 제막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 고 싶다고 말하고 공적비 건립은 앞서가 는 종인에 대한 후인들의 성의임을 강조 했다. 화석 회장은 내세울만한 일을 하지 못 했 는 데 저 의 공 적 비 를 세 운 것 은 더 열 심 히 해달라는 것으로 여생동안 더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하여 종중에 기여할 수 있 도록 할 것을 다짐한다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각오를다졌다. 무은공 종중은 밀성박씨 좌상공파 지 파종중으로 내금위장으로 인조반정과 이 괄의 난에 정사진무양공훈을 세워 상사 철권(賞賜鐵券)을 받았고 불천위(不遷 位 )의 특 전 (特 典 ) 을 받 을 받 은 무 은 공 박 세중을 파조로 하는 종중으로 정사원종 일등공신록권(일등)과 진무원종 공신록 권(이등)을 비롯한 교지 12점 호적단자 6 점, 상소문 6점, 완문 3점을 포함한 29점 의 고문서서가 1995년 5월에 전라북도 유 형문화재 147호로 지정 받았고, 2000년 부조묘 풍양사를 문화재 지정을 받음으 로서 그동안 8회에 걸쳐 4억여원의 국비 를 조달하여 아름다운 유산으로 거듭나 게 하 여 지 역 의 토반으로서도 의 무를 다하는 종 중 으 로 자 리 잡 아 이 날 공 적 비 의 주 인 공 들 의 행 적 을 짐 작 해 볼만하다. 한 편 숭 공 단 건 립 은 지 난 봄 무 은 공 선 조 향 사 후 가 진 오 찬 에서 순옥 회장 이 성암공(휘 종 석)의 공적을 잊 을 수 없다며 보 은의 방법을 제 안하고, 종중원 들이 공적비 건 립을 주창하면서 종중운영에 크게 헌 신 한 몇 분 을 더 선 정 하 자 는 제안이 잇따르고 성금이 답지하는 등 종원들의 한결같은 성원에 단소를 숭 공단(崇功壇)이라 명명(命名)하고 오늘 제막식에 이르렀으며, 제막 후 내빈과 후 손들은 무은공 부조묘에 들러 알묘 후 선 조님의 유훈을 받들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박흥식명예기자(광주광역시지부) 밀성박씨무은공종중숭공단건립제막식 가 져 위선봉사에헌신한종원공적비세워후인들에게전해 박순옥 추진위원장이 내 빈소개에 이어 기념사를 하고있다. 박화석고문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