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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9월30일 토요일 6 (제129호) 관향조 종친회 밀성박씨12파를연계하여30권으로 만든신유대동보(1741년발행) 족보는 계급사회의 등급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는 신라시대부 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계급(신분)사회였다.시조 박혁세 왕에서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왕족을 성골이라 하였고,무열왕 이 후의 왕족을 진골이라고 구분하였다. 혈통에 따라 신분에 제한 을 두었던 골품(骨品) 제도, 즉 개인의 혈통(血統)의 높고 낮음 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에 이르기까지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 러가지특권과제약이가해졌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도 신분의 차이 즉 반상의 구분은 명확했 다.그러나반상을초월하는예외도있었다.文宗(기원1047년)때 부터 과거제도를 개혁하면서 상놈도 제한적으로 과거를 볼 수 있었고, 고려 말 무인정권시대에는 천민도 무장으로서 높은 반 열에오를수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반상의 구분이 더욱 엄격해져 폐단도 많아 1894 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벌어진 제2차 갑오개혁 때 반상의 구분이 폐지되고 1895년 을미개혁과 1912년 제령(制令)인 <조 선민사령> 중 호적에 관한 규정, 1922년의 총령(總令)인 <조 선호적령>은 일제치하에서 새로운 호적이 생겨나면서 성과 이 름을새롭게가질수있었다. 그러나 최근 우리사회는 씨족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부계중심의 호적제도가 없어지고, 재가한 며느리가 데 리고간아이들의성(姓)도바꾸는시대가되었다.그런가운데에 서도 최근 뿌리를 찾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는 반면, 요즈음 아이 들은 뿌리나 족보에 관심이 없다며 포기하는 어른들이 늘어나고 있는양극화현상이벌어지고있다.그러나분명요즈음아이들들 은 족보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며 온라인에 카페를 만들어 활 동하고 있어 기성세대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져준다면 아이들의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해보며 우리 문중의 족보 약사에대해알아본다. ■ 족 보 의 의의 족보는 한 가문의 정치·생활사,혈통의 실증과 혈족 여부를 확 인케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동일씨족의 관향을 중심으로 시조 때부터 현재까지의 부계를 중심으로 혈연적 관계를 명확히 함으 로서 씨족 간 결속을 다지고, 중중의 빛나는 명예나 조상의 업적 을 회고(回顧)하게 함으로서 조상을 존경하고 동족 간에 종횡으 로 연결된 실체를 인식케 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또한 종묘나 사 당에 신주를 모시는 순서 및 친족 간의 멀고 가까운 관계를 나타 내는촌수(寸數)구분에지극히필요하기도하다. ■족보의기원 족보란 위 서문에서도 언급했듯 계급사회의 등급제도의 산물 로서 자기가문의 정통성과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옛날 중국에서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이 있었고 신라에서도 왕공귀족들이 이용했고, 그 후 고려 말 사대부가의 계통을 적은 가승(家乘)이 전해진 것이 지금의 족보 기원인 듯 하다. 조선시 대에는 역대왕실의 세보가 있었을 뿐이며, 사대부의 집에서는 가승이 마련되어 오다가 성종 때에 와서는 처음으로 발간되기 시작한것으로전해지고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족보는 안동권씨의 성화보 (1476년)가 아닌 ‘충주박씨 내외자손보’로 1474년에 발행되었 다. 안동권씨 성화보보다 2년 앞선 것으로 충주박씨 내외자손보 를 만 든 박 원 창 이 처 가 인 안 동 권 씨 족 보 에 많 은 영 향 을 미 친 것 으로추측된다. 충주박씨 내외자손보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의 자식도 기록한 족보로,조선전기족보형태이다. ■박문(朴門)의족보약사 우리 가문의 족보는 앞에서 언급했듯 각 문중마다 계통을 적 은 세계 즉 가승이 전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세보를 만들고 더 나 아가파보와대동보를만들어왔다. 1574년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충주박 씨내외자손보’는 눈여 겨 볼만하다. 충주박씨 족보의 특징은 아들은 물론 딸과 그 자녀 (외손)들을모두싣고있는데있다. 안동권씨 성화보도 같은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은 충주박씨 성 화보를 만든 박원창의 외가가 안동 권문으로 안동권씨 족보를 함께수찬하였던것이다. 우리 박문의 족보간행시기는 1600년대 족보체계를 갖추고 만 들어지는데 1577년 회재 박광옥 선생이 만든 음성박씨 정축보이 다. 이후 밀성박씨 행산공파 추선록이 있는데 이는 국담 박수춘 선생이 1600년 초 발행한 것이며, 규정공 후 박정현 선생이 발간 한 만력 경신보(1620), 태안박씨 능허 박민선생이 발행한 족보 (연대 미상), 전주박씨 을사보(1665년), 울산박씨 임자보(1672 년), 함양박씨 무오보(1678년) 경주박씨 갑자보(1684년) 등이 뒤를따른다. 대동보 형식을 갖춘 것은 밀성박씨 세보(1741년)로 전체 30권 으로 되어있다. 이는 행산공 후 국담 박수춘 선생의 현손 동고 (東皐, 휘 윤현)·만와(晩臥,휘 윤광)형제분의 인고(忍苦)의 결 실(結實)이다. 신유대동보라 하는 ‘밀성박씨세보’는 밀성대군 이후 처음 12 중조를 표기하고 12파 문중의 합보라는 점에서 더욱 빛이 나고 서문을 보면 각파의 족보를 취합하여 대동보를 만드는 과정과 족보의 기원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어 동고 박윤현 선생의 서 문을실어마무리하고자한다. 옛날 구문충(歐文忠)과 소노천(蘇老泉)이 각각 세보를 두었 는데 구문충은 한(漢)나라 연대표를 의지하고 소노천은 예기 (禮 記 ) 의 대 소 종 으 로 차 례 를 하 였 으 니 그 예 는 비 록 같 지 않 으 나 다 그 세차를 상고 하는데는 족한 것이다.세차를 알지 못하면 그 원 근 친 소 의 분 별 과 본 원 (本 源 ) 의 나 온 바 를 알 지 못 할 것 이 다. 물과 나무에 비하면 처음은 한 근원이요 한 뿌리인데 근원이 깊은 후에 일백줄기가 나뉘고 뿌리가 굳은 후에 일천 가지가 뻗 어 나 나 니 사 람 이 어 찌 이 에 다 르 랴 . 삼 가 살 펴 보 니 예 기 에 아 버 지를 같이한 자 형제요 할아버지를 같이한 자 종형제요 증조할 아버지를 같이한 자 재종형제요 고조를 같이한 자 족이라고 하 였으니 이로부터 점점 멀어지며 친(親)과 정(情)이 다하여 노상 행인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처음에는 다 한사람 몸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한 근원의 물이 일백 줄기가 나뉘고 한 뿌리의 나무 가일천가지가뻗어남과다르겠는가. 우리 밀성박씨는 신라왕(新羅王)에 근본하여 팔군(八君)이 각 지방을 나누어 다스림으로부터 성씨는 같으나 관향은 다르게 하였다. 우리 종(宗)은 밀성대군으로 중조를 하고 신라 고려를 거쳐이조에이르러팔방에번성하여동국의대성이되었다. 이문정공(李文靖公)이 팔가(八家)가 다 후손이 있는데 밀성 이 더욱 드러났다고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대군의 뒤로부 터 동경중 옆에 이르러 휘욱(郁)은 삼한 대장군이 되었고 아들 휘 란(瀾)은 요동독포사가 되었으니 이문충공이 이른바 밀양의 박씨파 흐름이 심히 성한데 그 근본은 다 공(公)에서 나왔다고 한 것이 옳은 말이다. 이로부터 四대(代)가 보첩에 실전 되었고 고려 때 각 파가 중조(中祖)로 일컬은 분도 十二명공(明公)이었 다. 시중 밀성부원군 휘 언부(彦孚)는 실로 나의 중조요 도평의사 밀직군(都評議使密直君) 諱 언상(彦祥)과 우복야밀직군(右僕 射密直君) 휘 언인(彦仁) 고 사문진사(四門進士) 휘 원(元)고 밀성군 휘 척(陟)과 사헌규정(司憲糾正) 휘 현(鉉)과 중서밀직 군(中書密直君) 휘 중미(中美)께서도 나의 중조이신데 혹은 형 제요 혹은 후손이며 밀직부사(密直副使) 휘 양언(良彦)과 영동 정(令同正) 휘 원광(元光)고 판도판각(版圖判閣) 휘 천익(天 翊)과 삼사좌윤(三司左尹) 휘 을재(乙材)와 정국군(靖國君) 휘 위( 쭈)는 모두 대군의 후손으로 즉 마땅히 세차를 상고하여 소 목을 밝혀야할 것인데 대장군 이상 독포사 이하는 시대가 창상 (蒼桑)이라. 문적이 너무 간략하니 사가(史家)의 의심난 것은 궐한다는 원칙을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겠지만 고려말년 이조초에 각 파의 명공께서는 옛 세대가 멀지도 않고 세계의 잃음도 없는 데 중조의 분파를 자상하게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 어떤 까닭 인가. 옛날 서문충공(徐文忠公)의 화산(華山) 족보 서문에 우리 동 방이 예로부터 종법과 족보가 없어 비록 명문거족이라도 가승도 없고 다만 두어 세대만 전하니 증조·고조 이상은 기록치 않고 자 손들도 점점 정의가 성그러져서 혹 시공( 얄功)의 친함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 종중이 보첩을 잃어 세계가 궐하게 됨 도이런연고인가. 임진 왜전의 병화에 공사(公私)의 문적이 거의 없어진 즉 혹 대보가 있다 해도 불타버려 자상하게 상고할 수 없는 연고인가 내 일찍 우리 종중 두어집 간행한 족보를 살펴보니 다만 그 중조 일파만 기록하였으니 이 친족을 너르게 합하는 뜻이 아니다. 나 의 국담선조께서 일찍 구보를 의거하사 추선록(追先錄)을 편찬 하시면서 약간 각 중조의 일파를 기록하고 세보를 이어 편찬할 뜻을 우리 후손에게 끼쳐 주셨고 나의 중부 술재께서 진사 직장 여러 종속과 더불어 이 뜻을 술선(述先)에 두셨으나 이루지 못 하였으므로내항상개탄하였다. 경신년 겨울에 동생 윤광(胤光)과 더불어 경외(京外) 제종에 게 통보하여 수보할 것을 알렸더니 사문(斯文) 계산 세붕(稽山 世鵬)씨는 나의 선조 문절공 도은 선생의 파예(派裔)라. 신유년 봄에 호서(湖西) 종인들과 더불어 제학방조(提學傍祖)의 이하 파까지 수록하여 동고(東皐) 서당에 나를 찾아와 二개월 동안 머물면서 함께 교정을 하였다. 도주(道州)의 사겸(思兼)과 밀주 (密州)의 증엽(增曄)이 은산군파의 구보를 안고 왔으나 은산군 은나의행산선조의백파이다. 이에 우리 중조 일파와 비로소 합록하고 또 十一제파를 이어 서 기록하였으니 가히 연계(聯系)가 된지라 이에 세보를 편성할 때 국사와 가장을 상고하여 성을 받은 본원과 시조의 분봉사실 을 기록하고 또 그 세대와 서열 중조를 살펴 자손을 기록하였으 니 아울러 아름답고 연이어 꽃다워라 참으로 빛나고 성하도다. 그도덕문장과충효절의가앞뒤를서로이어졌다. 혹 공이 사직(社稷)에 있어 간책(簡冊)에 빛나며 혹 사문(斯 文)에 도가 높아 사림(士林)에 사표(師表)되여 혹 세상을 멀리 하고 지조가 높아 백대의 풍성이 솟았으며 혹 의를 따르고 세상 을 피하여 만고의 강상을 세워 크게는 국맥을 붙들고 적게는 문 호를 빛냈으며 각 파의 외손들도 명현석학이 많아 이따금 국조 준원(國朝濬源)을 도운 즉 우리 시조의 쌓은 덕과 남은 경사를 가히증험하겠도다. 보책을 이미 이룸에 여러 어진이의 행적을 가려내어 간략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또 구양(歐陽) 족보를 의방하여 대군 뒤 十二 중조 계도를 그려 위에 붙이고 높이 모신 국계를 책머리에 써서 밀성박씨 연계대보라 하였으니 총 三十권이다. 이에 인출하여 팔방제종에게 반포하여 먼 후손으로 하여금 다 관향을 받은 바 와 파류의 나뉜 바를 알게 하니 가히 은의가 돈독하고 윤리가 바 르다고하겠다. 오호라,우리 밀관동종(密貫同宗)이 보첩을 잃어 중조는 비록 다르나 모두 우리 대군의 후손이니 이 연계보가 옛날 황악(黃 渥)이 족보를 잃고 억지로 황산곡(黃山谷)을 형제라고 한 것이 비교해 보면 판연히 다르다. 각 파가 동보하지 못한지가 자못 千 여년인데 오늘날 처음으로 합보 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 는가.옛날 소목공(召穆公)이 서주 종족까지 규합했다는데 군자 들이 종법이 치법과 더불어 서로 서로 좌우된다고 하였으니 지 금 이 연계보가 종족을 합하는 뜻인 즉 다만 우리 일문의 사사로 움만아닌것이다. 주자 말씀에 뷺보계가 밝은 후에 효제의 도가 나고 충후한 바람 이 행한다.뷻고 하셨으니 옛날 각파가 소원(疏遠)하여 길손과 같 은 자 이로 인하여 배겟의 친함을 알 것이니 우리 보중사람들은 먼저 효제로 서로 전하고 충효로서 서로 힘쓰면 세상 다스리는 도에조금이나마도움이될것이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보학상식- 박문의 족보 이야기 1574년발행된충주박씨내외자손록(성화보)-대전광역시유형문화재제46호 본관 발행년도 보명 비고 충주박씨 1574년 성화보 내외자손보 음성박씨 1577년 정축보 정승공파 태안박씨 1620년 추정 능허박민선생저술 전주박씨 1665년 을사보 울산박씨 1672년 임자보 함양박씨 1678년 무오보 경주박씨 1684년 갑자보 고령박씨 1707년 정해보 무안박씨 1711년 신묘보 영해파 강릉박씨 1716년 병신보 밀성박씨 1741년 신유보 대동보 면천박씨 1759년 기묘보 죽산박씨 1771년 신묘보 상주박씨 1774년 갑오보 상암공후남양파 영해박씨 1786년 병오보 보은파 월성박씨 1839년 기해보 영암박씨 1852년 임자보 박문의 족보발간 연대(본 표는 본보에 기증된 파보에서 발췌한 것임 알려드 립니다. 더상세한 자료 수집을위해아직기증하지않은문중의족보와문집 을기다립니다.) 뱚신유세보서문 전국을 통일한 후 2백50여 년 영화를 누려온 통일신라는 5 2대 효공왕(孝恭王)대에 이르러 쇠망의 기색을 보이더니 후 백제,후고구려,고려가잇달아일어나국토를야금야금빼앗 아가기 시작하였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은 완산주(完 山州-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신라를 공격, 영남의 고령 (高靈), 합천(陜川), 영천(永川), 선산(善山) 일대를 점령하 였다. 뒤 늦게 후고구려를 계승한 고려(高麗)의 왕건(王建) 도 만만찮게 남하 문경(聞慶)과 안동(安東) 일대를 차지했 다. 54대 경명왕(景明王)대에는 대부분의땅을 빼앗기고 영 남의 일부지역만 신라의 지배 영역이였다. 경명왕은 즉위하 자 마 자 8 왕 자 에 게 얼 마 남 지 않 는 땅 을 식 읍 (食 邑 )으 로 나 누 어주고사수(死守)를명령하였다. 다섯 번째 왕자 박언창(朴彦昌)이 사벌대군(沙伐大君)으 로 책봉(冊封)되어 사벌주(沙伐州)로 부임한 것은 경명왕 원 년(서기 917년),사벌땅은 현재 경북상주 일대로 3한시대부 터 사양벌국(沙梁伐國), 사불국(沙弗國)으로 불린 비옥한 땅,아직은신라땅이기는하나견훤군과왕건군에둘러싸여 있어언제이들두나라에먹힐줄모를위험한상태였다. 사지(死地)나 다름없는 이곳에 부임한 박언창은 사벌동과 흔구(欣口)촌에 방어본영을 설치하고 병풍(屛風)산성,이부 곡(吏部谷)산성, 자산(子山)산성을 새롭게 쌓는 등 국토방 위에 전력을 기우렸다. 견훤군의 공격도 끈질겨 부임 다음해 에는 본국의 수도 경주와 유일한 통로였던 의성(義城) 일대 를빼앗겨바다속의섬과같이고립상태에빠져있었다. 살아남는 길은 독립해 적들과 사투를 벌리는 길 밖에 없었 다. 그는 이 같이 결심하고 그해(서기 918 년) 본국과 독립된 사벌국(沙伐國)을 창건하였다. 국도(國都)를 사벌동으로 정 하고 궁전과 왕성을 새로 축조하는 등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사벌국의 위세는 문경의 조령에서 예천, 상주, 금릉(今陵), 추풍령까지 4개 군에 이르렀다.양면에 견훤 군,왕건 군과 대 치한 사벌국은 쓰러져 가는 고국 신라를 계승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적의끊임없는공격을막아내었다. 적으로 둘려 싸인 고도(古都)속에서 사투로 버티기 10여 년, 영천에서 왕건 군 1만을 뚫고 경주에 입성하여 경애왕을 시해하고 대구 팔공산에서 왕건군(王建軍)의 정예 5천명을 궤멸(927년)한 이후 곧이어 왕건군의 점령지인 안동(安東) 을 공격하던 견훤은 후방이 염려 되였던지 사벌왕 11년(서기 929년) 9월 돌연 군졸 5천기를 선산(善山)방 면으로 돌려 낙 동강을 도하 사벌국 수도로 돌격해 왔다.불의의 습격을 받은 사벌왕은 왕성을 굳게 닫고 버티었으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패해 항전 13년, 재위 11년의 사벌국은 멸망(서기 929년)하 고말았다. 조선 중종(中宗)시대 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사벌국이 멸망한지 5백 여 년이 지난 후 역사적인 고 증과 구전으로 신라인의 마지막 항전 모습을 그린 그의 저서 사벌국사(沙伐國史)에서이상과같이기록하고있다. 그러나 당 시대에는 편수관이 저술한 사서(史書)외에 사 저(私著)를 국법으로 금하고 있어 그의 사벌국사는 몰수 당 해 회신(灰燼)됐다. 다행히 그의 저서를 빌려본 친구 박세준 (朴世俊)이 이를 발초(拔抄), 은밀히 후손에게 유전(遺傳) 하여 지금까지 사벌국의 역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 다. 이 같은 사실은 한말(韓末) 사학자 단재(丹齋) 신채호(申 采浩)선생에의해서도확인된바있다. 그는 그의 명저(名著) 『조선역사상 1천 년래 제1대편』에 서 이언적이 일찍 사벌국 전을 지어 비밀리 가장(家藏)했다 가 우연히 친구의 휴거(携去)한바 있어 대화(大禍)를 당할 뻔한일이있었다라고쓰고있다. 현재 사벌국의 역사적 잔해는 당시 수도였던 경북 상주군 사벌면 금흔(衾欣)리를 중심으로 곳곳에 흩어져 있다. 금흔 리는상주읍에서 동쪽으로20리 지점의 조용한 농촌마을,둔 진(屯陳)산과 병풍(屛風)산 등이 북서쪽으로 감싸고 있어 적의공격을피할수있는천연의요새지이다. 지금은 50여개의 농가만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어 당시 신라인들의끈질긴저항 흔적을 찾아 볼 길이 없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반경 10km 이내 동서남 방향으로 금흔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부곡(吏部 谷)산성 등 3개 산성들의 잔해들만이 옛 신라인들의 발자취 를 느끼게 할 뿐이다. 쓰러져가는 조국을 계승하겠다며 사벌 국을 창건했던 사벌국왕은 이 마을 입구 둔진산아래 소나무 숲속에누어있다. 높이 4m, 둘레 47m 크기의 이 대형 왕릉은 순조(純祖) 27 년(서기1827년) 왕릉 앞의 5층석탑(보물 117호-현재 3층만 남아 있음)속에서 “사벌왕묘”이라고 전각(篆刻)한 지전(誌 塼)이 발견됨으로서 사벌왕릉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었 다. 왕릉 앞 30m지점 조그마한 개천 위에 걸려있는 왕활교(王 活橋)는 견훤의 침공다시 왕이 다리 밑에서 난을 피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기도. 원형은 반월형 돌다리였으나 1백 여 년 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시멘트다리로 바뀌었다. 이 같은 유적 이외에도 당시 수도였던 금흔리에는 지금도 밭이나 논에서 기와와 토기파편 등이 자주 드러나고 있어 사벌국 사실(史 實)을뒷받침하고있다. 그러나 오늘날 사벌국의 역사는 사적(史的)인 가치를 평 가받지 못하고 있다.그래서 우리나라 역사 속에 사벌국이 존 재했었다는사실을아는사람도많지않다. 비록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단명한 소국가였 다 하더라도 짓밟힌 조국을 되찾으려는 신라인의 끈질긴 의 지를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이 시대에 사벌국의 역사를 재조 명할필요가있을것같다. (경향신문 1981년 09월 16일 김성기(金成麒) 기자가 기획 연재한 글임) /자료제공상주박씨 후(后)박태순님 호국의핏줄로사수한후신라13년 <護國> <死守> <後新羅>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