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page

2017년9월30일 토요일 4 (제129호) 관향조 종친회 전남 장성군 서삼면은 편백나무와 삼나무가 광활한 숲 을 이루고 있어 맑은 공기와 산림욕을 즐기려 수많은 방문 객들이들렀다가는휴식과레저의고장으로유명하다. 편백나무 숲길을 따라가다 보면 광주과학수사연구소를 지나 첫 번째 마을이 세포마을이다. 세포마을은 입구에 들 어서면 ‘밀양박씨세장비’가 있고 당산에 시비가 즐비하니 문학의고장임을알수있다. 세포마을의 입향은 400여년 전 복야공(휘 언인)의 15世 휘 희주(希朱) 公으로 전남 영광 군동에서 입향 이후 13代 에 걸쳐 250여호로 번성하였으나 각기 생활터전으로 이거 함에따라현재는10여호가남아있다. 복야공은 밀성대군의 8世이고 휘는 언인(諱 彦仁)으로 태사공 휘 언부(太師公 彦孚)의 아우로 고려 때 벼슬이 벽 상삼중대광평장사(壁上三重大匡平章事) 상서 좌복야(尙 書 左僕射)를 역임하고 밀직군(密直君)에 봉(封)해졌다. 아들 직신(直臣)과 장(璋)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직신(直 臣)이 고려조에 문림랑으로 문림랑공파의 파조가 되고,차 남 장(璋)은 누대를 지나 란계공파(휘 연), 국당공파(휘 흥생),이요당공파(휘흥거)로각각분파된다. 장성 입향은 문림랑공파 직계후손으로 호남지역 입향은 문림랑공의 13世 휘 용경(勇卿)으로 그는 1465년 1월 2일 태어나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으로 연산군의 폭정 으로 사직하고 전남 영광군 군동면 이흥산 아래에 입향 시 거(始居)하였다. 6대손 승선(承善)의 기록에 의하면 매헌 (梅軒) 이인형(李仁亨, 조선전기 문인) 선생등과 종유(從 遊)하고 1507년(정묘정변) 이괄의 난에 의병을 모집 완산 에서 적을 토적(討賊) 이조참의에 제수되었음이 절의록에 기록되어전해진다. 첨정공은 아들 기(琪), 경(經) 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기 (琪)의 호(號)는 월정(月汀)으로 1537년에 진사시에 올랐 다. 조산지(鳥山志)에 의하면 1542년에 장성부사를 역임 하여 그의 장남(휘 希顔)은 현재 영광의 세거지에 남았고, 삼남휘희주(希朱)公이장성입향의계기가된듯하다. 한편첨정공의차남경(經)의후손들은제주도로이거하 였다. 장성 세포마을 이거후 입향조(휘 희주)의 아들 성남(成 楠)은 장사랑(將仕郞)이고 손자 대련(大連)은 선공감 주 부, 증손 사형(士亨)은 1656년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5 대손 신종(信宗)은 천성이 순후하고 사리에 밝았으며, 특 히 효심이 지극하여 세칭 박효자라 불러져 그 기록이 삼강 록에 전해지고 후손들은 대를 이어 효를 실천하고 있어 세 포마을박씨들은근동에서는효자마을이라한다. 그리고 이에 뒤질세라 후손들은 선진지를 견학하며 종 사의 체계를 세우고, 입향조 이하 선조님의 재사(齋舍) 숭 효재(崇孝齋)를 중심으로 우애와 돈목을 이룸으로서 추원 보본의정성을다하고있다. 특히 후손들은 행정,세무,교육 공무원으로 사회에 진출 두각을보이고있다. 입향조의 14세손 형동은 문불여 장성으로 불리우는 장 성 문인협회를 이끌어오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 으며, 마을입구에 2015년 출향향우들이 중심이 되어 시비 (詩碑)를 세워 문학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토반(土班)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실천하는모습이아름다운행실로전해진다. 종중의 원로 남근 현종은 후손들의 반듯한 모습에 항상 감사한다고 말하며 선조님의 향사나 벌초, 마을의 대소사 에 많은 종원들이 참여해 발전을 이루고, 후손들이 반듯이 성장 할 수 있도록 책임을 다 할 것이라며 오늘도 젊은 청 년들의 보학(譜學) 증진에 앞장서고 있어 세포마을의 미 래는밝다할것이다.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뱚뱚뱛집성촌탐방 전남장성군서삼면대덕리세포마 을 밀양박씨복야공후문림랑공파첨정공종중 숭효재-입향조이하 선조님을모시는재사. 시비 동산(당산)-박형동 시인의 시(詩)가 새겨진 비(碑) 4기가 앞뒤로 8편의시가새겨져있다. 마을의내력을소개하고시비앞에선남근현종과 형동시인. ▶시비잡초의땅,9면시참조) 도천정사는1626년경도암박응복(朴應福)선생이명현 선비들과 교유하며 서적과 자연의 경치를 즐기기 위해 건 립한 정사(精舍)이다. 전면 4칸 측면1.5칸의 팔작지붕으로 가 운 데 두 칸 은 강 당 으 로 경 도 당 (景 桃 堂 )이 라 하 고 양 쪽 에 방 을 두 어 오 른 쪽 은 서 적 을 보 관 한 장 서 료 (藏 書 寮 ), 왼 쪽은둔세실(遯世室)이라하였다. 선생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혁혁한 공으로 선무원종 공신 3등에 녹훈되고 훈련원 봉사에 제수되는 등 출사(出 仕)의 길이 있음에도 공명을 멀리하고, 광해군의 혼암(昏 暗)한 시기에 벼슬에 뜻이 없고 연로하신 부모님 봉양을 위해 낙향 은둔하여 학문 탐구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최 초건립 후 300여 성상이 지난동안 정사(精舍)는 퇴락하여 1925년 도암공의 10세손 휘 곤복(坤復)에 의해 중건되고, 당대의 거유 장석영 선생의 도천정사기(桃川精舍記)와 최 현필선생의상량문(上樑文)이남아있다. 선생의 휘(諱)는 응복(應福) 자(字)는 여일(汝逸), 호 (號)는 도암(桃菴)으로 밀성대군 후(后) 행산공(휘 세균) 의 차자(次子)소감공 휘 문익(少監 휘 文翊)의 아들 휘 신 필(臣弼, 진사공)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휘 한수(漢壽)와 어머니 완산이씨 와의 사이에 1582년 경주 부남 상신리(현 내남면상신리)옛집에서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대장부다운 기질이 있었고,159 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세(賊勢)가 매우 창궐하고 경주 지방이적의통로의요충지로피해가더욱심하였다. 이에 초야의 의사(義士)들이 창의 궐기(蹶起)함에 아버 지(휘 한수)께서 마을의 장정들을 인솔하여 적진으로 달 려갈 때 선생의 나이 11세 임에도 팔을 걷어 부치고 따라가 기를 원하며 이르기를 뷺국가(國家)에 대난(大難)이 있는 데 다만 몸을 피해 달아나려고 하는 것은 대장부(大丈夫) 로서 할 바가 아니다. 더구나 어버이께서 친( 親)이 칼날을 무릅쓰고 달려가시는데 소자(小子)도 역시 마땅히 시석 (矢石,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의 사이를 사양(辭讓) 할 수 없습니다. 어찌 남의 신하(臣下)가 되고 자식(子息)이 되어 군부(君父)의 위급(危急)에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뷻하였다. 이에 대인공(大人公븡아버지)께서 그 뜻은 장하게 여기 면서도 나이 어린 것을 민망하게 여겨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고 시종(始終) 모시고 따르며 힘써 군사를 익히니 기예 (技藝)가 날로 진취(進就)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렀다. 1594년 선생이 무과에 응시코자한데 대인공(大人公)이 이르기를 뷺어찌 13세의 동자(童子)로 군사(軍士)를 쓸 수 있느냐뷻고 하니 선생이 옷깃을 여미며 대답하되 “남자의 나이 이미 성동(成童)이 되면 무엇인들 이루지 못하겠으 며, 더구나 국가가 어지러운 이때이겠습니까?” 하고 과연 무과에 급제하니 보는 이가 기이하게 여기지 않은 이가 없 었다. 1597년 정유년에 왜적이 재침할 때 선생은 분연히 일어 나 고을을 가보고 나서 스스로 의병에 참가하여 많은 적을 참획(斬獲)하고 창암(倉巖, 영천 동쪽 끝) 전투에서 적의 유탄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거의 생명을 잃을 뻔하였다.이 때노(奴)기복(基卜)이라는者가있어부호(扶護)하여일 단 적 을 피 해 응 급 구 료 하 고 선 생 이 타 던 말 을 타 고 달 려 가 집에알렸다. 대인공(大人公)이 그때 화왕산성으로 달려하려다가 이 급보를받고창암으로급히달려가가마에태워돌아왔다. 선생이 전장의 상처가 체 낫기도 전에 병(病)을 무릎 쓰 고 다시 일어나 전장으로 달려갔다. 조정에서는 이 사실을 듣고 장(壯)하게 여겨 훈련원봉사에 제수하고 선무원종공 신3등에녹훈(錄勳)하였다. 난리가이미평정되고대인공(大人公)도늙으셨다.이에 노친 봉양(奉養)을 위해 벼슬을 사양하고 공명(功名)을 구하지 않았다. 옛 사람들의 글을 즐겨 읽으면서 이르기를 “무인(武人)이 되어 이미 제후에 봉(奉)해지는 공업을 세 우지 못하고 글로도 또한 도(道)를 들은 선비가 되지 못하 였으니 대장부(大丈夫)의 수치(羞恥)라”하였다. 때마침 혼암(昏暗)한 광해군의 조정을 당하여 더욱 세상에 뜻이 없고산수간에은둔소요하면서일생을마치려고하였다. 관해 임회(觀海 林檜, 1562∼1624. 조선 중기의 문신)의 어질다는 명성을 듣고 항상 천리길을 무릅쓰고 달려가 수 학코자 하였으나 때마침 관해공이 간인(奸人)의 모함으로 양산에 유배와 있어 거리가 매우 가까웠다.이에 선생이 탄 식하면서 이르기를 “임공(林公)의 불행이 도리어 나에게 는 다행이었다.”하고 임공의 적소(謫所)에 나아가 뵙고 학 성 이겸익(鶴城 李謙益)과 더불어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 침을받았다. 1623년 인조원년에 대인공(大人公)의 상고(喪故)를 당 하여 예절에 따라 집상(執喪)하였으며, 상기(喪期)를 마 치고 도산(桃山) 밑 화천(花川) 위에 정사(精舍)를 지어 도암(桃菴)이라 편액(扁額)하고 거기에서 거처(居處)하 며서적(書籍)을즐기고자연을벗삼아여생을즐겼다. 또한송죽(松竹)과국화(菊花)를심어 노경의 취미를 붙 였다.1642년 암행어사 오모(吳某)가 조정에 진달하여 용 양위부호군을 더해주고 통정대부에 승진(陞進)하였다. 16 44년 고종(考終)하니 향년 63세이다. 부인은 숙부인 동래 정씨이다. 선생의 휘는 곤복(坤福), 초휘는 병복(炳福), 자(字)는 원뢰(元雷),호(號)는 고암(古庵)이다.도암공(휘 응복)의 10세손으로1896년화천(花川)에서출생하였다. 선생은 숭조정성(崇祖精誠)이 남다른 극진한 효성(孝 誠)이었으니 도암선조의 정자가 폐허되어 정자를 영건(營 建)함이 후손들의 시급한 일이라고 여기어 문중 노소와 수 의하여 「중건(重建)을 늦출 수 없다」며 사유의 기와와 목 재를 이용 단시일 내에 기공하여 낙성을 고하였다. 따라서 중건기문과 상량문, 현판문을 명인 선비에게 청하여 선조 의 아름다운 자취를 계승코자하는 지극한 정성(精誠), 높 이찬양할바다. 학문역시 퇴도(退陶, 이황)의 학맥을 계승하여 교남사 류(嶠南士類, 영남)의 종사(宗師)가 된 회장 장석영(晦堂 張錫英, 1851∼1929. 독립운동가·유학자.) 스승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항일의사이자 석학(碩學)인 심산 김창숙 선생을 흠양하여 종유교밀(從遊交密)하였다. 또한 시인으 로 항일하다 옥사한 육사 이활 선생과 교분이 두터웠으며, 당대 거유인 문암 손후익, 회계 장조현, 극암 이기윤 선생 과 더불어 동문으로 회보(會輔)의 자익(資益)이 있었으니 선생의고상한인품을십분짐작할수있다. 1945년에 광복을 맞이하여 지방유지회장에 선임되었으 며, 또 계성중학교한문학 강사로 선발되어 많은 후학을 양 성하다가 모부인(母夫人)의 상고(喪故)를 당하여 예제 (禮制)에넘치는지나친애통(哀痛)으로 병(病)을얻어19 48년 2월 27일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한대 향년 53세로 고종(考終)하였다. 뱚뱚뱛재/실/탐/방 도천정사(桃川精舍) 경북경주시건천읍화천리312번지 도천정사기(장석영著) 상량문(최현필著) 도암공박응복(桃菴公朴應福)유사(遺事) 도천정사전경. 뱚고암박곤복선생(古庵朴坤福)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