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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9월30일 토요일 2 (제129호) 기 획 927년 9월, 견훤의 반격이 개시된, 초미의 상황에서 신라의 구원 요청이 있기까지, 경애왕의 동맹자 왕건은 선제적 대응 을취하지않은채시간을끌었다.왕건은사전에세루트를통 해견훤의동정을익히파악하고있었다. 첫째, 완산주를 비롯한 백제 강역에 심어 놓은 첩자들의 보 고망, 둘째, 경북 내륙에 둔영을 구축한 고려군의 치보, 셋째, 왕 도 의 인 후 (咽 喉 )라 할 고 울 부 능 문 의 보 고 등 세 갈 래 를 통 한 상황 파악이 가능했다.한데 신라 구원 사절이 왕건에게 구 원을요청할때까지왕건은즉각적조치를취하지않았다. 그 결과 신라 경애왕이 구원요청을 하는 것,그 기록 자체부 터 공수 동맹의 심각한 모순이며, 왕건의 적나라한 방관을 보 이는 확증인 셈이다. 또 경애왕의 구원 요청이 있은 후에조차 왕건은즉각친정하지도않았다. 대신뚜렷한군공이나무용조차알려지지 않은공훤을주장 (主將)으로삼아 출정하게한것이대응이라면대응의전부였 다. 공훤이 거느리고 출병했다던 ‘경병(頸兵) 1(만)萬’의 구 원군’마저 경애왕 죽음의 순간까지 서라벌에 결코 이르지 않 았다. 927년 정월~8월까지 고려와 신라 연합의 전면 대공세 로 견훤의 반격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된 927년의 엄중한 시 기, 왕건은 시간을 허비하며 수수방관, 철저히 방관자적 입장 을견지했다. 신라내에서도경애왕거세를노리는세력이존재하고있었 다. 특히 김부는 문성왕의 6세손, 헌강왕의 외손으로 친가 및 외가 모두 김씨로서의 정통성을 옹유하고 있었다. 외가만 김 씨인 경애왕에 비해 더욱 우월한 정통성을 지녔다. 그럼에도 왕위계승권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김부의 가슴 속 품은원한이깊고절실하였다고도보인다. 또 당시 형세로 보아, 김부는 정상적 방법으로는 절대 왕위 에 도전,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 존재로서, 어떤 무리수를 감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였다.신덕왕,경명왕,경애왕 으로 이어진 박씨 왕계에서 보이듯, 국내의 민심과 세력 상황 에서 김부는 결코 정상적인 수순을 거쳐 왕위를 계승할 수 없 는 상황에 직면,봉착하였다.이로 인한 깊은 좌절감과 복수심 을내면에품고있었다. 견훤의 압박, 왕건의 방관, 신라 내 반란 세력의 준등 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경애왕에게 있어 ‘현실 속 악몽’, ‘위기 의시간’이가히도래한셈이었다. 견훤의 공세, 왕건의 방관, 신라 내 반대세력의 준동 등이 목전에 펼쳐지는 당시 상황은 경애왕에게 있어 사면초가의 시간이었다. 우민(憂悶)에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지만, 잠을 자되 편안히 자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되 그 맛을 모 르고 아름다운 미녀들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며 종과 북 의 아름다운 소리조차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위기의 시간이 었다. 이처럼위기의순간,경애왕이술이나퍼마시면서해롱거렸 다는 것은 상식에서 심히 벗어난 일로서,그 진실성은 실로 일 고의 가치도 없다고 하겠다. 까닭에 경애왕이 행차했다고 한 포석정의 의미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에 포석정에 대하여 보다면밀한검토가더욱필요하다. 최근 일각에선,927년 당시 경애왕이 남산에서 호국을 기원 하는 행위(이른바 불계, 팔관회 등)를 하다 비운의 죽음을 맞 았다고 주장한다. 얼핏 당시 경애왕이 최소한 유흥에 빠져 술 에 취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일면 경애왕의 신원에 도 움이될듯보이는주장이기도하다.한데과연그러했을까? 적의 침입 시점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초미(焦眉)의 상황에 서, 경애왕이 신의 가호에 기대어 무사안일만을 빌었다. 이러 한 견해는 경애왕을 천하의 주정뱅이로 몬 견해만큼이나 생 뚱맞긴매한가지이다. 적의 침입이 목전에 이르러 생명이 경각에 처했는데, 일국 의 군주가 군비는 제쳐두고 천박한 샤머니즘, 원시 신앙에 빠 져 있었다는 것은 현실적,군사적으로 설득력이 아예 없다.그 런 시각은 미신에 빠져 헤매는, 천박한 샤머니즘 논자들의 주 장이라치부할수밖에없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와서, 포석정은 신라 55대 경애왕의 운 명을가른 장소였다.한데포석정은『삼국사기』에2곳,삼국유 사에는4곳에걸쳐서만언급되고있다. 특히 『삼국사기』에 의할 경우 ‘포석정=경애왕 주흥의 장소’ 로만일관되게파악된다. 무슨 까닭으로,어찌하여,『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언 급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두 군데에 걸쳐 다시 포석정에 관하여언급하고있는것일까? 『삼국유사』만의 포석정 관련 서술의 내용은 1)‘포석정=지 성소’,2)‘포석정=효종의유행지’라는내용이다. 먼저, 일연이 말한 대목, 포석정=지성소란 구절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일연 당시까지도 포석정=지성소의 맥락은 이 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일연이 '포석정=지성소'임을 드러내 는 전거를 채록했던 것이었고, 이는 일연의 노력에 앞서 유구 한전승,전통의힘이었다. 일연보다 앞서 김부식이 활동했던 인종의 치세에는 더욱 븮포석정=지성소븯라는 생생한 전승, 전통이 있었을 것임은 의 심의 여지가 없다. 이른바 ‘포석정=지성소’라는 전승은 김부 식의 생존 당시는 물론이고, 적어도 일연이 생존한 때까지도 전승되고있었다.지성소인포석정에서주흥이과연가능했었 는지, 논리상의 면밀한 검토나 의심은 응당 당연하고, 따라서 지성소에서 주흥이 있었던 까닭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있었 어야만 한다.한데 『삼국사기』는 왜 븮포석정=지성소븯(헌강왕) 라는사실에관해철저히침묵을지켰던것일까. 포석정은, 일연이 서술한 바와 같이, 헌강왕이 각별한 의미 를부여한지성소였다. 포석정에 지성소의 의미를 부여한 장본인 헌강왕은 경애왕 의 외할아버지(外祖)였다. 일연 당시까지도 지성소의 맥락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연보다 앞서는 김부식의 활동 시기, 또 그보다 더욱 앞서는 신라 경애왕대에 있어, 단연 포 석정은지성소로서의의미를지녔다고생각된다.외조인헌강 왕이 지성소로 규정한 포석정에서,『삼국사기』에 의한다면 외 손자인 경애왕이 술판을 벌인 셈이 된다. 헌강왕이 포석정에 이른 것은 875~885년, 헌강왕이 사망한 것은 885년이었다. 경 애왕이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927년이었다.경애왕이 불과 반 세기(대략 42~52년)만에 포석정을 지성소에서 거나한 술판 의장으로바꾸어놓은것이된다. 더군다나,경애왕이포석정에서술판을벌인시점은견훤의 침습을 눈앞에 둔 상황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당시 위기 상황에서, 외조 헌강왕이 신성한 장소로 지명한 곳에서, 경애 왕이 태연히 술판을 벌였다는 『삼국사기』기록의 문면은 액면 그대로 믿기 어렵다.『삼국사기』의찬자들이 처음부터 경애왕 =망국의 혼군, 포석정=술판의 장소라는 등식을 설정하였고, 그에 맞추어 사실을 기록하고 채록하다보니, 이와 같은 결과 가 나타난 것이었다는 판단이 일단 가능하다. 이에 경애왕의 죽음과 관련한『삼국사기』의 서술, 포석정의 서술 전반에 대 해근본적이고도원초적인의구심을품지않을수없다. 일연은 철저한 체험 정신에 입각, 충실한 현지답사와 견문 을 토대로 『삼국유사』를 작성하였다.또한 『삼국유사』의 작성 과정에서『삼국사기』를여러곳에서저본으로삼고있다. 이 점에서, 『삼국사기』에서 분명히 언급되고 있는 ‘지은’이 란이름을일연이보았을것은추호도의심의여지가없다. 결국 일연이 ‘지은’을 알고 있으면서도 과감하고 단호하게 삭제한 것은 다분히 일연의 고의적 조치로서, 그 기저에 일연 혼자만의 ‘떨리는 내면의 고통’, ‘일정하고 분명한 의도’가 도 사리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까닭에 일연이 ‘빈녀양모’의 제목 을 설정한 데에는 필시 일연 나름의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고 보인다.나-2)④의내용을단락별로구분,제시하면다음과같 다. A)①孝宗郎②遊③南山④鮑石亭.[⑤或云三花述.] ⑥門客 星馳.⑦有二客獨後.⑧郎問其故. B)⑨曰芬皇寺之東里有女. ⑩年二十左右. ⑪抱盲母 ⑫相號 而哭. ⑬問同里. ⑭曰. ⑮此女家貧. 뛝乞횻而反哺有年矣. 뛞適 歲荒. 뛟倚門難 뛠以藉手. 뛡贖賃他家. 得穀三十石. 寄置大家 服役. 日暮깔米而來家. 炊餉伴宿. 晨則歸役大家. 如是者數日 矣. 母曰. 昔日之糠粃, 心和且平. 近日之香櫃, 膈肝若剌, 而心 未安.何哉.女言其實.母痛哭.女嘆 己之但能口腹之養.而失於 色難也.故相持而泣.見此而遲留爾. C)郎聞之潛然. 送穀一百斛. 郎之二親亦送衣袴一襲. 郎之千 徒,겄租一千石遺之.事達震聰. D)時眞聖王賜穀五百石, 幷宅一廛. 卒徒衛其家. 以儆劫掠. 旌其坊爲孝養之里. E)後捨其家爲寺,名兩尊寺.『삼국유사』권5효선9 貧女養母 일연의 관심은 『삼국사기』의 지은, 『삼국유사』의 ‘빈녀’가 아닌, 정작 효종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삼국유 사』권5 효선9 貧女養母에서 효종과 주변 인물이 행위의 주체로 나타나 는점이 그러한 점을암시하고있다고할것이다. 또한 일연은 효종과, 효종의 동선에는 유독 관심을 두면서 도, 동시에 효종의 나-2)④에서 父名(D), 少名(D), 결혼(D) 에대해죄다생략했다. 일연이 나-2)④ D)~을 생략한 것은 효종의 동선을 더욱 돋 보이게 하고, 초점을 두어 밝히고 강조하려는 의미가 있다고 보인다. 까닭에 나-2)④에서 효종을 중심으로 한 여러 기록, 동선에대해면밀한검토가행해질필요가있다고여겨진다. 나-2)④의 A)①에서 孝宗郎은 ③南山의 ④鮑石亭에 遊했 다. 앞서 포석정은 헌강왕이 남산의 산신을 접신한 지성소였 음을 살핀 바 있다. 이러한 지성소, 포석정에 효종과 그의 1천 무리(혹은 幾千 『삼국사기』권48 열전8 효녀지은 )가 유행한 것은 매우주목되는일이아닐수없다. 포석정은 헌강왕이 화상석까지 새겨 신성성을 드러낸 지성 소였다.이런 점에서,효종과 휘하 무리들의 행동은 ‘불가침의 성역을 범한 신성 모독 행위’이자 효종의 ‘私的 일탈’이다. 해 석 여하에 따라서, 이는 왕권 내지는 왕조 자체에 대한 불충, 패역으로규정되고비쳐질수있다. 나-2)④의 ⑥門客星馳, 나-2)④의 郎之千徒라는 구절에서 포석정에서 이루어진 회합의 규모가 상식의 범위를 뛰어 넘 는대규모,집단적,의도적인성격의것이었음이확인된다. 이후 과연 효종과 그 무리를 대상으로 포석정에의 접근이 제한되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여왕이 효종을 질책하기 는커녕, 효종과 그 무리의 행동에 묵인, 적극 동조하고(나-2) ④D),나아가 이를 빌미로 효종을 그녀의 일족과 혼인시킨 일 련의 일(포상)들에서(나-2)④D),효종에게 포석정 일대에 대 한禁足의포고가내려졌을가능성은희박하다. 일연 당시까지 효종의 유행지를 두고 여러 說이 혼재했던 저변에는이러한까닭이작용했으리라짐작된다. 이런맥락에서포석정일대를효종의세력범위로규정해도 무방하다고판단된다. 또 한 나 -2 )④ A )⑤ 의 ‘或 云 三 花 述 ’이 란 구 절 역 시 음 미 할 대목이다.나-2)④에서 일연은 효종이 유행한 곳에 대하여 포 석정(나-2)④A)④)은 물론, 삼화술(나-2)④A)⑤)이란 제2 의 지점까지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왜 일연은 본문의 대의와 는 큰 관련이 없는 사항, 효종의 유행지를 두고 이렇듯 A)④ 鮑石亭은 물론이고, 애써 A)⑤三花述까지 상세히 거론한 것 일까. 일연은 포석정과 삼화술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효종의유행지를포석정,삼화술양대지점으로기록했다. 일연이 양대 지점을 기록한 것은, 일연 당시까지 효종의 유 행지가 양대 지점으로 자주 거론되고 있었으며, 동시에 효종 이 포석정에 뒤지지 않을 만큼 삼화술에도 자주 유행했었고, 그러한 효종의 움직임이 오랜 시간 너머, 세간에 폭넓게 퍼져 있었다는것으로정리될수있다. 또한 이처럼 효종의 유행지, 포석정과 삼화술을 놓고 일연 마저 혼동시킨 것은 효종의 포석정, 삼화술 유행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된 결과, ‘빈녀’와 관련된 유행의 지점 역시 도저히 하나로 특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 렀음을드러낸다. 결국 일연의 충실한 견문에 의하여, 효종의 세력권이 포석 정에서 삼화술까지를 망라하는 범주를 형성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 다이런 점에서 효종 세력권의 한 축인 포석정에서 경애왕의 운명 이 급전직하하고, 경애왕의 주검이 효종 세력권(포석정이라는 한 축과, 나머지 한 축인 삼화령)의한복판인 해목령에서 처리되었다는 점은 주목 되는일이 아닐수없다. 일연이 말한 삼화술은 대체 어디일까. 현재 경주 남산에서 삼화령은 2곳이다.남산 금오봉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 각 한 곳씩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븮삼화령(三花嶺)븯, 북쪽에 있는것은븮(전)삼화령(傳三花嶺)븯이다. 포석정에서 남산으로 곧장 오르면 (전)삼화령에 닿게 된다. 남산 서쪽 골짜기 아래 포석정이 있고, 남산 상부의 해목령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전)삼화령이 있다. 포석정은 남산 서쪽 아래 지점,(전)삼화령은 남산 북쪽 능선,그 사이에는 해목령 이 있는 셈이다. 해목령을 감싸고 (전)삼화령을 스치면서 남 산신성이축성되어있다. 이를테면 (전)삼화령, 해목령, 포석정으로 이어지는 델타 지대의 안쪽으로 남산 신성이 둘러싼 형국이다. 포석정에서 올라간다면 남산 신성(서남쪽 성벽),해목령,남산 신성(북쪽 성벽),(전)삼화령이 나타나게 되고,도당산 혹은 상서장에서 올라가면 (전)삼화령,남산 신성(북쪽 성벽),해목령,남산 신 성(서남쪽 성벽), 포석정이 나타난다. 모름지기 포석정-해목 령-삼화령의 델타 지대가 상정되며,각각의 지점은 경애왕 죽 음의의혹과관련을맺고있는셈이다. 『삼국사기』는 효종랑이 지은을 구휼한 일로써, 진성여왕의 가없는 칭찬을 받았고 다시 헌강왕의 딸과 혼인하였다고 밝 히고있다. 그 결혼을 통하여 효종의 아들, 김부가 태어났다. 한데 『삼 국유사』는 동일한 ‘지은’의 일을 두고 주인공 ‘지은’에 대해서 는 거의 설명조차 없다. 대신, 구휼의 사단이 비롯된 장소가 바로 포석정이었던 점,효종의 포석정 유행의 전말,효종이 거 느린 1천 낭도의 회합,진성여왕 치세 등,시간과 장소 등을 스 토리텔링을이어나가듯구체적으로거론하고있다. 『삼국유사』가 멀쩡히 있는 ‘지은’의 이름을 생략하여 ‘빈녀’ 로 처리한 것이나, 구성에서 문단의 주어가 하나같이 효종 중 심으로 짜인 점 등은 애초 『삼국유사』의 내러티브(서사)가, 『삼국사기』가감추고있는효종관련사실을상세히드러내기 위함이아니었던가판단된다. 아울러『삼국유사』는 효종이 포석정~삼화령에 걸쳐 세력권 을구축하였음도밝혔다.까닭에『삼국유사』의언법대로라면, 포석정이야말로 효종의 세력권을 보여주는 일단이며, 효종의 결혼을 가늠하는 증거이며, 김부의 출생을 이끈 곳이었다. 경 애왕이 포석정에서 운명이 갈리고 그 뒤를 이어 김부가 견훤 에 의해 ‘권지국사’로 옹립되었으니, 포석정이야말로 김부의 집권을이끈,‘흥왕지지’라고일컬을수있다. 이에 『삼국사기』는 애써 포석정과 효종랑(김부의 아비)과 의관계를부정하고삭제했음을알수있다. 『삼국사기』는 1)‘포석정=헌강왕 이래의 지성소’, 2) ‘포석 정=효종의 유행지’라는 내용을 원천적으로 산삭한 셈이다.요 컨대 『삼국사기』가 1)‘포석정=헌강왕 이래의 지성소’라는 대 목을 민멸한 까닭은 ①헌강왕=경애왕의 외조인 점을 염두에 둔 결과, ②‘포석정=주흥의 장소’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불가피한조처였다. 외조인헌강왕이포석정을지성소로공포한사실과,외손인 경애왕이 지성소에서 술을 퍼마셨다는 두 사실은 성립하기 힘든극단의배치,역설이기때문이다. 또 『삼국사기』가 2)‘포석정=효종의 유행지’라는 내용을 생 략한 까닭은 ①효종= 김부의 아비인 점을 염두에 둔 결과, ② ‘포석정=효종랑의 세력권’이라는 일련의 사실을 감추어,3)경 애왕 운명을 가른 장소(포석정)=김부 일가의 세력권이라는 주요 사실을 덮어, 경애왕 최후와 관련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 하려는 노력의 일단이라 보인다. 경애왕의 주검 또한 효종의 세력권내(해목령)에서처리됐음은더욱주목된다. 『삼국유사』는김부식이누락한포석정의 내력,포석정과김 부 일가와의 관계, 효종랑(김부의 아비)의 세력권 등, 주요한 내용에 대해,답사와 견문을 토대로 세세한 고증과 주석,이설 (異 說 ) 을 덧 붙 이 고 있 다 . 이처럼, ‘경애왕의 최후’와 ‘김부 일가의 세력권(포석정, 삼 화령,해목령)’이 뚜렷이 연결,해석된다는 것은 눈여겨 볼,퍼 즐(MissingLink)의한대목이다. 견훤이 김부를 포함하는 김씨족의 시조 알지를 기리는 성 소, ‘시림’에 진군한 것 역시 하나의 일상적이고 우연, 돌발적 인 것이 아니라, 깊은 상징적 의미, 전략, 전술적 의도가 담긴 조치였다고보인다. 결국견훤과김부가연대하여경애왕제거시나리오를가동 하였던 결과, 경애왕은 김부 일가의 세력권에서 죽었으며, 견 훤은그논공행상의대가로김부를옹립하기에이르렀다. 927년, 김부가 견훤, 둘 사이에는 경애왕 거세를 위한, 이른 바 ‘거세(참수) 시나리오’의 면밀한 설계가 짜였다고 보인다. 뱚이 경우 가장 중요한 항목은, 시간(D Day)과 장소, 수순일 것이다. 결국 경애왕의 포석정 유행 역시 자발적이거나 일상 적인 것이 아니며, 군사적으로 견훤의 압박 전술에 따라 이뤄 진불가피한유행,탈출이었다. 필경 경애왕은 죽음의 덫이라 할 포석정에서 김부의 손에 의하여제거된셈이었다. 김부가 견훤에 의해 옹립된 데에는 1)친 견훤 노선을 취한 김부의 종전 행적, 2) 927년 견훤과의 내응과 경애왕 거세, 등 으로 압축될 수 있는데,김부가 경애왕 치세 전반에 걸쳐 정권 에서 배제되었기에, 1)의 개연성은 낮고 2)의 개연성이 보다 높은 셈이다. 1)경애왕 최후와 관련된 지점들이 김부와 묘한 연결고리(알고리즘)을 형성한 점, 2)견훤이 신라를 병합하는 따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미궁과도 같은 수수께끼 역시, 견훤이김부의족쇄와약점(경애왕시해)을잡고있은자연스 런결과라여겨진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927 ) 뱚역사 비정(9) 뱚Ⅰ. 927년경애왕의위기 박 순 교 뱚Ⅱ.포석정은경애왕의외조가정한지성소, 경애왕유흥의장소일 수없어 뱚Ⅲ.효종랑의세력권과경애왕의 최후 내용 번호 삼국사기 번호 삼국유사 포석정 나-1)① 삼국사기 신라본기 12 경애왕4년11월조 나-2)① 삼국유사 권2 기이 김 부대왕조 나-1)② 삼국사기 권50 열전10 견휜조 나-2)② 삼국유사 후백제 견휜 조 나-1)③ (생략) 나-3)③ 삼국유사 권2기이2처 용랑망해사 나-1)④ 삼국사기 권48 열전8 효녀지은 나-2)④ 삼국유사권5효선 貧女養母 그림 A. 포석정B. 해목령C. 삼화술. 일연은효종무리의동선을포석정~삼화술로 설정하고있다. 경애왕의최후에결정적전기 가일어난 지점A, 경애왕 이 장사지내졌다는B는모두효종세력의활동권역에포함되어있다.경애왕죽음직후효종의아들김부는신라의권력을차지했 다. 뱚Ⅳ.경애왕최후와『삼국사기』의주작(做作) 목 차 Ⅰ.927년경애왕의위기 Ⅱ.포석정은경애왕의외조가정한지성소, 경애왕유흥의장소일수없어 Ⅲ.효종랑의세력권과경애왕의최후 Ⅳ.경애왕최후와븮삼국사기븯의주작(做作)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