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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9월30일 토요일 12 (제129호) 기획 곧은 절개로 형(兄)·제(弟)·자(子)·질(姪)이 같은 길을 택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영해박씨 문중의 단종절신7현 (賢)은 한마음으로 같은 길을 택했다.수양 대군이단종을몰아내고왕권을찬탈할때취금헌박팽년선생을비롯한사육신은나가서순절했고,많은신 하들이벼슬을버리고은둔하며절의를지 킨것은 천추(千秋)에 빛을 내고 있어 이들을 단종절신이라 한다.영해박씨는 고려와조선 초 특별한 신임으로 조정에 출사하여 요직을 맡았다.세종대 왕으로부터총애를받아오던평양서윤영해박씨박창령(朴昌齡)선생의장남박낭은병조정랑,차남박도는판 중추부사,삼남박제는예조좌랑,박낭의 아들 박규손은 예빈경,박천손은 사직,박도의 아들 박효손은 형조참판,박인손은 병조정랑,박계손은 병조판 서 등 모두 쟁쟁한 직책에 있었으나 이들 중박도박제박규손박효손박천손박인손박계손등7명과매월당김시습과정재조상치등이절의를지키며 강원도철원군근남면초막동으로와함 께은둔해이들을구은(九隱)이라한다.은입(隱入)해서산에의지해수간초막(數間草幕)을치고그곳에서거 처하면서아홉분이자규사(子規詞)한편씩 을읊어서단종을지극히사모하였으니그사(詞)의문사(文辭,문장)가글귀마다진심에서우러나오는뜨거운 정성의피눈물이서리어있어그들의충 절을엿볼수있다.이에이번호에서는구은(九隱)의향화를받들고있는구은사(九隱祠)와영해박씨7현(賢)선 조를소개해보고자한다. 구은사는 조선시대 단종복위를 도모한 시조 관설 당의 40세(世) 도(渡)와 아들 인손(璘孫), 계손(季 孫)과, 아우 제(濟), 형인 랑(浪)의 아들인 손(奎 孫), 효손(孝孫), 천손 (千孫), 매월당 김시습 (金時習), 정재 조상치 (曺尙治)를 합하여 구은 (九隱)이라 하며, 이들의 절의를 숭상하기 위해 18 18년(순조18)에 영해박 씨 후손들과 관내 사림의 발의로건립되었다.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초막동에 내려와 은거하 며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 으나뜻을이루지못한지3백50여년만이다.그러나18 64년흥선대원군의서원철페령에의해철거되었다가 고종3년(1894년)에 이 터에 설단(設壇)하여 구현(九 賢)을 다시 배향하고, 1921년 중건되었으나 한국전쟁 의와중에사우가완전소실되어제향이중지되다가1 960년 박규손의 15대손 박재민의 발의로 초막동에서 김화군수의 초헌으로 노천봉행(露天奉行)되었다. 이 후 1971년 가 사우(假 祠宇)를 부설하고 제례를 이어 오다 1977년 영해 박씨 후손과 사림제현(士林諸賢)의 찬조로신사우(新祠宇)를중건하고9월의상정일(上 丁日)에 준공 및 추계제향(秋季祭享)을 올렸다. 구은 사제향은매년음력3월과9월상정일에봉행된다. ▲구은사창건기 슬프도다 단종의 신하로서 죽음으로서 충성을 다 한 육신(六臣)이 있고 풍진세속의 불의를 박차고 입 산(入山)하여 반정(反正)의 단성(丹誠)을 다한 아홉 분이 있으니 이분들이 구은의사(九隱義士)이다. 그 정충(精忠)의빛난절개는다음이없고다만생사(生 死)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즉 판중추부사 돈수 박 공 휘 도(渡)와 동생 부사직 경은공 휘 제(濟)와 질 (姪) 예빈경 탁영재공 휘 규손,과 참판 운와공 휘 효 손,사직공휘천손,정랑공휘인손,판서포신공휘계 손 및 동봉 김공 휘 시습, 정재 조공 휘 상치 이다 . 돈수공은 충열공 관설당 휘 제상의 후손으로 두 나려(羅麗) 양조(兩朝)의 고관대작을 지내시어 한 집안에서 잇달아 승출(承出)하여 우의형구(羽衣亨 衢)하여생용분치(笙鏞賁治,청아로영재를육성함) 하다가 단종대왕께서 왕위를 내놓으신 날부터 명리 (名利 )를 버 리 고 강 상 (綱常)을 붙 들 마 음 으 로 돈 수 공 형제 및 자여질(子與姪) 칠인이 함께 동봉 김공 및정재조공아홉분이같이자규사(子規詞)한편씩 읊어서단종을지극히사모하였으니그사(詞)의문 사(文辭)가 글귀마다 단성(丹誠)의 피눈물이 서리 어 있다. 후인들이 그 동네 이름을 구은동(九隱洞) 이라고 지었는데 이 아홉 분들이 소요하던 곳에 돌 솥을 걸었던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고, 이의 사적 은 김 유 당 (金 柳塘)의 수 고 지 (搜古誌 )와 유 창 주 (劉滄洲)의야일록(野逸錄)에기재되어있다. 그런데 사육신 제현과 생육신인 매월당 및 정재 선생들은 다 준조( 펠俎)로 향사를 받들고 있는데 돈수공 일문 칠의사는 예부터 지금까지 전무후무 한 충성의 높은 절개는 그 사적을 빛나게 받들어야 할 터인데,이제까지 한간의 사당도 없어서 의로운 정령(精靈)이 의지할 곳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개탄을금하지못한지오래되었다. 그러던중 세상의 정론(正論)은 백대(百代)후에 도 바른길로 돌아가는 법으로서 지난 무인(戊寅) 년에 관북(關北) 유림 및 자손들이 비로소 사당을 세우자는 발의(發議)가 있어 시공(施工)하기로 다 수 결의 되었으나 이의 규모가 간단하지 아니해서 신중(愼重)히 사당의 자리를 협정(協定) 또는 고 유(告由) 절차를 갖추고 산재(散在)한 여러 관계 사람및자손들에게통문을발송하니모두향응(響 應)되어 낭묘(廊廟)에 품고(稟告)하니 유생들이 내려오며 어진 분들을 사모하는 정성은 의당(宜 當)하다는 통론(通論)이 일치되어 관계열읍(關係 列 邑 )의 유 생 들 과 영 박 각 파 자 손 들 이 각 기 응 분 의 성금을 모아 수월동안에 공사가 진행되어 사당이 엄성(儼成)되었다. 이해 9월 상정일(上丁日)에 구 은선생(九隱先生)의 위패를 정당(正堂)에 봉안하 고 향사해서 아홉 분 은사(隱士) 선생의 영령이 이 제로부터의지할곳이있게되니실로몇만대를두 고드문장한처사요사림의다행한일이다.여기에 사실을대강들어서현판(懸板)에새기노라 무인(戊寅,1818년)관찰사함양박경덕삼가지음 ▲ 돈 수 박 도 선 생 공의 휘는 도(渡)인데 신라만고충신 관설당(휘 제 상)의40세(世)이다.평양서윤박창령(朴昌齡)의차남 으로1396년에 태어나 세종때에 사복정(司僕正)에 이 르렀다. 형(兄)·제(弟)·자(子)·질(姪)이 모두 귀(貴) 하게되었으나공의성품이본디견고하고확실하여소 박하고 청빈하여 벼슬에 나가기를 싫어한지 오래되었 다. 1455년에 이르러 여러 아들과 모든 조카들이 모두 처음에는김화초막동에들어가매월당김시습과정재 조상치와 함께 은둔하였다가 공은 지형(地形)이 얕아 오래 머무를 수 없다하여 처자와 함께 멀리 문천 운림 산(文天雲林山)에 들어가 숭질(崇質)이란 옛 호를 돈 수(遯쑴 )라고 고쳤으며, 산수(山水)의 즐거움에 편벽 (偏僻)되어 문망(聞望)이 없이 수년 동안 있다가 1459 년향년64세로일기를마치었다.(김시습지음) ◇돈수공자규사(子規詞) 자규(子規,소쩍새)가우네자규가우네/목메어슬피 슬피 무엇을 하소연할까?/불여귀 불여귀(不如歸, 두견 새의별명)라하네/파협(巴峽)을가려해도가지못해우 노라네/산은비고날은저문밤에왜그리꽃사이에피 를뿌리며애원(哀寃)을토할까?/가지에서가지로잎에 서 잎으로 애끊는 소리소리...../ 서(西)도 아닌 동(東)도 아닌북(北)쪽만을바라보며..../슬픔이올 때 그 소리 들 으면 눈물 금 할길 없네/ 초혼조(楚魂鳥) 동청수(冬靑 樹,사철나무)와한(恨)이같다고천고에헤아려왔다네. 주(註) 초혼조(楚魂鳥)-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에 갇혔 다가돌아오지못하고죽어원조가되었다고함. ▲경은박제선생(坰隱朴濟) 공은 돈수 박도 선생의 동생으로 조정에 있을 때 의 휘는 제(濟) 자는 형부(亨夫), 초야에 있을때의 휘는 숭의(崇義) 호는 경은(坰隱)인데 예조좌랑 (禮曹佐郞)을 지냈다. 1455년에 돈수공 등 여러분 과함께김화초막동에숨어자규사를지어서로부 르다가 다시 문천 운림산(文天 雲林山)으로 들어 갔다가 또 서쪽 정양 광림산(定襄 廣林山)에 숨어 아호를 또 불식옹(不食翁)이라 하고 청송부(靑松 賦)를지어읊으면서그곳을떠나지않았다. 제자가 일찍이 조용한 틈을 타서 경은(坰隱)이란 호의 뜻을 물으니 공이 말씀하기를 “서울 밖을 교 (郊)라 하 고 교 밖 을 목 (牧)이 라 하 고 목 밖 을 야 (野)라 하 고 야 밖 을 임 (林 )이 라 하 고 임 밖 을 경 (坰) 이 라 하 는 것 이 니 지 금 내 가 사 는 곳 이 바 로 임 천 (林 泉)인 데 경 은 (坰隱 )이 라 고 호 를 한 것 이 마 땅 치 않 으냐?”또불식옹(不食翁)이란호의뜻을물으니한 숨을 내쉬면서 서글프게 탄식하기를 “너희들이 알 일이 아니니라” 제자가 다시 일어나서 다시 머리를 숙여 묻기를 “선생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 또한 심 의의심이됩니다.”공께서한참말없이있다가말씀 하 시 기 를 “선 친 소 윤 공 께 서 관 직 에 계 실 때 법 을 지 키고공도(公道)를다하셨는지라그러므로항상여 러 자질(子姪)들에게 훈계하시기를 『임금을 섬겨 충성을 극진히 한 연후에야 가히 관록을 먹는다고 말할수있느니라고한바있다.』고하였다.” 아들 우(友, 漢의 초휘), 성(性, 楨의 초휘) 형제 모두 총명하고 준수하여 문학과 도량이 높이 뛰어 났으니 대체로 공의 가정교훈이 훌륭하였기 때문 인것이다.향년68세로일기를마치었다. ▲탁영재박규손선생(濯纓齋朴奎孫) 공의 휘는 규손(奎孫)으로 평양서윤 박창령공의 장남 휘 랑(浪)의 삼남으로 1426년에 태어나 성품 이 청렴하고 고상한 절개가 있어 약관(弱冠)시절 서울에 있을 때부터 매월당 김시습과 좋은 친구간 이었다. 단종 때에 예빈경에 이르렀는데 1455년 형 제와 여러 사촌들을 데리고 매월당 김시습과 정재 조상치와 함께 강원도 김화(현 철원군 금남면) 초 막동에 은거 하다가 1456년에 친상을 당하자 집항 하는 모든 절차가 예절에 맞았으니 그것은 모두가 김 선생과 같이 상의하였기 때문이고,묘지도 또한 김 선생이 지정하였으며, 그 뒤 모친상을 당했을 때도 역시 전과 같이 하였다. 그 후에 김 선생은 수 춘(壽春)골로 들어가고 조선생은 영천(永川)창수 (滄水)로 가고 형제와 사촌들은 모두 깊고 궁벽한 곳을찾아숨었다. 그러나 공(公)만은 떠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여기는 바로 우리 부모의 고향이다.선산(先山)이 가까이있으니차마멀리못가겠네산천은다옛모 습인데 주인 없어 슬프구나 초막동 외로운 달빛아 래 옛날의 자규사를 화창하며 살구꽃 봄바람에 평 생을 한가롭게 즐기리라 저 맑은 샘물을 잔질하며 내 갓끈을 씻을세라”하고 따라서 호를 탁영재(濯 纓齋)라 하였다. 1494년 3월 1일 영면하니향년69세이다. ◇탁영재공자규사(子規詞) 자규가 우네 자규가 우네/가지에서 하늘보며 무 슨학소연 있어서일까? 불여귀 불여귀라네/ 한번 떠 난 파 남 (巴 南 )을 다 시 가 지 목 하 고 금 성 (錦 城 ) 의 그 연화(烟花,봄 경치)는 어디다 두었기에/ 밤 마다 가지위에 문혈(吻血, 입에서 나오는 피)을 토 하는가?/ 잉수와 잔산(剩水殘山, 전쟁뒤에 황폐한 강산)에 봄마저 떠났으니 날아가고 날아온들 누가 너를 돌아보리..../ 네 소리 듣다 말고 내 눈물이 먼 저 지니 땅도 늙었구나 하늘도 황량해라 꼬리 무른 이한을다세기어렵구나/ ▲운와박효손선생(雲窩朴孝孫) 공의 휘는 효손(孝孫) 자는 자경(子慶)으로 탁 영재 공의 아우이다. 1428년에 태어나면서부터 지 혜로워 영예(令譽)가 있었으며 단종조에 벼슬이 형조참판이되었었다. 1455년 형제와 사촌 및 매월당,정재공과 함께 처 음에 김화 초막동에 숨어 자규사를 창화(唱和,한쪽 에서부르면한쪽에서화답함)하다가다시회양풍 악산(淮陽楓岳山)에들어가천지조화의오묘한이 치를 깨닫고 세상풍진을 피할 곳을 얻어 수년간 산 밑에서살다가사동(泗東)으로옮겨산수사이에살 면서높이집을짓고호를운와(雲窩)라하였다. 채미시(採薇詩)와 송국부(松菊賦)를 지어 취미 를 붙여왔는데 공이 일찍이 저술(著述)한 시를 태 워그원고가전해지지못했다. 1456년 친상을 만나 동봉 김 선생과 장능(莊陵, 단종의 능) 간계(艮溪)위에 함께 못가고 창벽(蒼 壁)에 동봉 선생의 화상을 그려 붙이고 날마다 올 라가 지팡이에 기대어 휘파람을 불며 혹 갓끈을 써 서 회포(懷抱)를 달래면서 항상 높은 곳에 올라 남 쪽을 바라보며 매죽루(梅竹樓)의 두견시가 그리워 초막동 수운구(水雲句, 돈수공이 떠날 때 정재 조 선생이 지은 송별시)를 부르다가 1495년 향년 68세 의일기로떠나셨다. ◇운와공자규사(子規詞) 자규가 우네 자규가 우네/ 달을보고 꽃을 보고 하소연을 못다해서 불여귀 불여귀라네 西山에 날 개털고 날아가고 싶어일까?/ 지사(志士) 곁에 와 서 울 때 그 원 한 그 리 고 깊 고 고 신 ( 孤 臣 )찾 아 날 아 와선 부질없이 피 토하네/ 끊임없는 한 긴 소리 어 쩌다가 짧은 소리 금성연화(錦城烟花,봄 경치) 그 리워서 권연(眷然, 사모하여 뒤를 돌아보는 모양) 히 돌아보네/아!그만두자 예로부터 유한(遺恨)은 다 그런 것 울고말고 돌아가고말고 모두 아득한 저 하늘에물어보자. ▲사직공박천손선생(司直公朴天孫) 공의 휘는 천손(天孫)인데 운와공의 동생이다.1 431년에 태어나 천품이 청렴하고 중후하여 구차 (苟且)하게 세속을 따르지 아니하고 독립해서 남 에게의탁하지않은지조가있었다. 가정의 학(學)으로 경서에 통달하여 당대에 명 망이 높았다. 평화스러운 세종때 벼슬이 사직(司 直)이 되었는데 1455년에 중부(仲父, 휘 도)와 계 부(季父,휘제)를모시고여러사촌들과함께북으 로 김 화 초 막 동 애 숨 어 자 규 하 를 창 화 (唱 和 )하 였 는데 그 시가 유실되어 전해지지 못했다. 그곳에서 수년간 서지(棲遲, 벼슬 않고 숨어서 삶)하다가 제 공들은 모두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여 분산하여 떠 나 갔으나 공을 말하기를 “김화는 선영(先塋)이 있 는 고향이라”하고 탁영재공과 함께 동거하다 1503 년에작고하였다. ▲정랑공박인손선생(正郞朴璘孫) 공의 휘는 인손(璘孫)으로 돈수공(휘 도)의 장 남으로 1417년에 태어나 평소부터 맑은 절조가 있 어 남들이 알아줌을 바라지 않았다. 일찍이 황고 (皇考, 돌아가신 아버지) 판중추공에게 교훈을 받 았는데 효성이 극진하고 공순(恭順)하여 그의 아 우 판서공과 우애가 돈독함으로 세상사람들이 옛 날 사마광(司馬光)과 백강(伯康) 두 형제와 같다 고칭송하였다. 벼슬이 병조정랑에 이르렀는데 1455년에 부자 형제와 여러 사촌 입곱분이 매월당 김시습과 정재 조상치 선생과 함께 처음에 김화 초막동에 숨어 자 규사를 창수(唱酬)하였는데 공의 가사는 원고를 태워서 세상에 전해지지 못했다. 그 뒤에 어버이를 모시고 아우들과 문천 운림산에 깊숙이 들어가 정 조(貞操)를품고지내다가세상을하세하였다. ▲포신공박계손선생(逋臣公朴季孫) 공이 관직에 있을 때의 휘는 계손(季孫)이고 입 산(入山)한 뒤의 휘는 숙손(叔孫)이며 자는 자현 (子賢)으로 노산조(魯山祖, 단종조)에 병판이었 다가 1455년에 김화 초막동에 숨어 조공 상치(曺 公 尙 治 ) 와 자 규 사 를 지 어 주 고 받 았 는 데 그 기 사 의 내용이 매우 처량하고 완곡하였다.그때 국가에 서는 공을 빈번히 찾았으므로 공은 더 깊이 숨을 계획을 세우고 부형을 모신채 문천 운림산 수한동 으로 자리를 옮겨 포신(逋臣)이라는 자호(自號) 를 붙이고 손수 묘문(墓文)을 지어 나에게 보여주 었 다 . 나 는 절 반 도 채 못 읽 어 서 눈 물 이 뺨 을 적 셨 는데 아!잠불(簪 삘,귀인의 의관)을 마다하고 설라 (薛羅,은자의 의복)를 입었고, 고량(膏粱, 맛있는 음식)을 싫다하고 미궐(薇蕨,고사리)을 먹었으니 모르는자가 보기엔 오활(迂闊, 실제와는 관련이 없음)한 짓이었고 아는 자가 볼 때는 분수였으며, 그때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궁벽한 짓이요 옛 사람 에 비겨보면 곧은 일이었다.질풍(疾風)에 굳센 풀 이었고 퇴파(頹波,거센파도)에 끄떡없는 지주(支 柱)였으나 장하다 공이여! 공은 부끄러움이 없는 분이다. 아버지 휘는 도(渡)인데 사복시정이요 어머니 는 파평윤씨로 영락(永樂) 17년 기해(세종1, 1419 년)에 공을 낳았다. 태어나서부터 남다른 기절이 있었으며 염우(廉隅,품행이 바르고 절조가 굳음) 를 가다듬고 원곡(圓曲,바르지 못한 것)것을 미워 하여 조야(朝野)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 았다. 조부의 휘는 창령인데 기성윤(箕城尹)이었고, 증조의 휘는 유로 전객령에서 벼슬을 그만두었고, 시조의 휘는 제상인데 절의로 영해백(寧海伯)에 책봉되어 신라때에는 자손들이 채읍(采邑, 공경제 후의 영토)을 먹었고, 고려때 와서는 13대가 국가 의 중요한 위치에 있어 이 나라 헌면(軒冕) 대성 (大姓)이었다. 공이 표연(飄然, 훌쩍 나타나는 모 양)한 자세로 더럽힐 듯이 생각하고 세상에 숨어 미련이 없었던 것도 조종(祖宗)으로부터 전해 내 려온 충절을 이어받은 소치가 아니겠는가?........<생 략>매월당김시습지음 ◇포신공자규사(子規詞) 자 규 가 우 네 자 규 가 우 네 / 원 망 한 듯 흐 느 낀 듯 그 하소연 무엇일까! 불여귀 불여귀하네 꿈속에서 금 성 (錦 城 )의 봄 몇 번 이 나 보냈더냐? 상녀(孀女) 의 창 가까이 가 울지마라 망부산 봉우리에 새벽달 이 나올적에/ 외로운 그림자 야윈 모슴 울고 또 울 적에 모르는 뭇 새들ㅇ이 누가 너를 돌보더냐/ 만 고 유 한 을 孤 臣 과 志 士 향 해 어 느 때 나 말 해 다 오 강 개하고슬픈마음가만히세어보리라. 구은사와단종절신7현(賢) 선조 유지를찾아븣 구은사.(강원도철원군근남면호국로 7003-23) 구은사전경. 구은사제향광경. 구은사(九隱祠) 구은사적비. 칠현사적(七賢事蹟)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