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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계서원(新溪書院) 향사(享祀)되어 있으니, 그 성취가 어떠한지는 알 수 있다. 불행이도 공의 묘소를 알 수가 없다. 그 자손된 사람들의 개탄스러움은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그래서 조선 말기 임오년 1882년에 여러 후손들이 진주 관아의 동쪽 월아산(月牙山) 금선봉(琴仙峯) 아래에다 제단을 설치해서 해마다 묘사(墓祀)를 지내왔다. 자손들이 그 주변에 모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내려면 재계(齋戒)하면서 자는 장소가 필요하다. 그래서 광복 3년전 임오(壬午:1942)년에 재실을 지어 물언(勿言)이라는 이름을 걸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묘(丁卯:1987)년에 이르러 국가에서 군부대를 설치하기 때문에 재실을 운당산(雲堂山)아래 죽전곡(竹田谷)으로 이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재실이 본디 좁아 재계하며 잠자는는데 애로가 많았고 또 세월이 오래되다 보니 낡고 기울어 더 이상 보수할 수도 없었다. 이에 "뜯어 내고 확장해서 다시 짓는 것이 낫겠다"는 종친들의 주장이 세차게 나왔다. 이에 의견이 일치되자 정성을 모아 대목을 부르고 목재를 구입하여 무자(戊子:2008)년 겨울에 공사를 시작하여 기축(己丑:2009)년 9월에 마쳤다. 다섯칸의 우뚝한 건물이 골짜기에 그득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들의 오랜 소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재실은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 아니고 여러 후손들의 피와 정성이 응집된 것이니, "아당(啞堂) 여러 후손들의 정신적 고향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후손들이 어디에 살던 이 재실을 어머니 품과 같이 생각하면 가히 안온한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의 거의 끝나갈 무렵에 물언재 고문인 상진, 영복, 성용과 이사인 해원 경상 어른들이 말하기를 "사실을 기록하는 글이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하자 이에 대종회장 용권과 총무 응상이 재주없는 나를 찾아와 글을 요청하였다. 내가 여러 후손들의 조상을 높이는 정성에 감동하여 굳이 사양하지 않고 이렇게 지었다. 이일에 있어 시종 가장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은 응권이다. 기축년(2009년) 입추절에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허권수는 삼가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