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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大夫忠淸道兵馬節度使修誠齊朴公墓碣銘竝書(가선대부 충청병마절도사 수성재 박공묘갈명병서) 宜春之闍崛山下有嘉禮水石卽節度使修誠齊朴公休官嘯咏之地也退陶老先生以同舘舊契 携公遊賞手書嘉禮洞天四大字刻之巖又於書巖白巖釣臺諸勝幷有題刻以先生之簡一字之 題而於嘉禮鄭重如是盖嘉公賦遂初而樂觀書亦許公襟靈風韻契此山水也當日論討之蹟若 可想像而公之爲公槪可見矣公諱芸字汝馨密城君諱彦孚其受封始慣之祖也麗季有忠肅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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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충청병마절도사 수성제 박공 묘갈명 병서 의령 자굴산 아래에 있는 가례 땅은 곧 절도사 수성제 박공이 벼슬을 그만두고 휘파람 불며 시를 읊조리던 곳이다. 퇴계 노선생은 같이 벼슬하고 옛적부터 공과 놀면서 즐김을 서로 나누던 사이로 가례동천 네 큰 글자를 손수 써서 바위에 각하고 또 서암과 백암 조대의 여러 경승지에 아울러 그 이름을 새기었으니 이것은 한글자의 제목이기는 하지마는 가례에 대한 친절함과 은근함을 나타낸 것이다. 이는 모두 공을 좋아하여서 마침내 처음부터 책읽기를 즐겨하는 공에게 주었던 것으로 공에게 흉금을 터놓고 풍류를 즐기고 시를 읊조리며 계모임을 하던 산수인지라 당일의 토론하던 유적을 상상할 수 있으니 공의 사람됨을 알 수 있도다 공의 휘는 운이요 자는 여형이다. 밀성군 휘 언부는 봉작을 받아 본관이 시작되는 조상이다. 고려 말 충숙공 휘 천익은 포은 목은 야은 제 현인과 더불어 같이 충절을 함께 하였다. 조선조에 좌의정을 주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세칭 송은 선생이라 하였는데 공의 고조부에 해당된다. 증조의 휘는 총으로 벼슬은 이조참의이며 호는 졸당이다. 삼가에 살기 시작하였다. 조는 휘가 희문이니 현감이요, 아버지는 휘가 언림이니 훈련원 판사였다. 어머니는 창령 조씨로 부사를 지낸 등의 여식이다. 공은 태어나면서 성품이 호방하고 기질이 있어서 무과에 올라 선전관 훈련원 첨정 청주우후 충청병마절도사에 오른바 자취가 깨끗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기록되었으나 마침내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경치 좋은 곳에 수성정사를 쌓고 소요하며 한가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마치었다. 관직을 제수 받은 해와 남긴 업적은 상세하게 얻을 수 없으나 추정하건데 인종과 명종 사이에 벼슬을 하였다. 오직 그는 무예를 중히 여기긴 하였으나향리의 교우관계를 보아서나 또 병서를 좋아하고 경전읽기를 즐겨한 것으로보아 문무를 겸전한 재질이 능하지 아니 함이 없었다. 같은 향리에서 조남명과 오죽유 여러 선생과 더불어 강마를 더하니 돌아가신 뒤에도 조선생이 만사로 공을 표현하기를 「오각 삼봉산 아래가 그대의 높은 문벌이 있음이니--봄날 이웃에 방아 찧는 소리 없으니 떨어지는 해 반산에 걸려 있도다」 라고 탄식함에 이르렀다. 공의 편제 자호는 비록 마을의 이름을 딴 것이나 건구삼거업을 취한 것으로 수사자는 반드시 전할 것이니 오늘날의 기송의 안타까움이리라 배는 김해 허씨로 정부인이며 진사 원보의 따님이다. 공과 더불어 합장하니 대평 천곡 간좌이다. 아들은 음직으로 통정벼슬을 한 사충과 사침, 판사를 지낸 사신이다. 사충의 아들은 서린과 교수를 지낸 서귀와 서붕이다. 딸은 정율에게 시집갔으며 감사를 지냈다. 사신의 아들은 서휘인데 현감을 지냈으며 임난의 공이 있고 호는 퇴휴헌이다. 딸은 판사를 지낸 김우추 진사를 지낸 성여신 군수를 재낸 이숙 현감을 지낸 강덕룡이 있다. 증손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옛날에 기록이 있었으나 임난을 당하여 분실되었다. 후손 응화가 낡은 기록을 거두고 가전되어 오던 것을 편집하여 오백리 길을 넘게 손자 호재를 보내어 이 늙은이에게 글을 부탁하니 오직 두려워 감당치 못할 일이나 멀리까지 와서 위촉하는 것이니 저버릴 수가 있겠는가 삼가 명을 서하니 명하여 가로되, 오래된 운대의 그림에 그믐날 해가 떨어지는 것과 같아서 어느 곳에서 공의 지나간 흔적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망연하기만 하지만 정채는 더욱 한 곳의 돌샘에 머물러 종사의 큰 글씨가 해 달로 높이 매달리고 높은 풍취와 맑은 운취가 이에 미치니 길이 전하는 노래되어서 공의 무덤에 푸르고 넓게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게 되리라. 임자년(1912년) 팔월에 완산 류필영(주11)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