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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정 (慕先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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德南祠(덕남사)의 沿革(연혁)과 三賢(삼현)의 略史(약사) 덕남사는 충숙공 송은 박익(忠肅公松隱 朴翊) 선생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순조 33년[계사, 1833)에 향도유림(鄕道儒林)의 공의로 덕남서원(德南書院, 새월)을 창건하여 송은 선생을 주벽(主壁)으로 長子 우당공(憂堂公)과 次子 인당공(忍堂公)을 배향(配享)으로 춘추에 봉사해 왔다. 고종5년(무진(戊辰), 1868)에 국령으로 훼철되어 서원강당은 신계재 정당으로 영정각(影幀閣)은 별묘로 이건하여 봉안해 오던 중, 1933년(계유) 모선정 후원에 영정각을 새로 지어 유림봉사(儒林奉祀)하고 있으며, 1989년(기사) 옛 사우명대로 덕남사라 편액(扁額)했다. 충숙공 송은 박익선생(忠肅公 松隱 朴翊先生) 송은선생(1332~1398)은 고려말의 충절신(忠節臣)으로 두문동 은사(杜門洞隱士)이며, 세칭 팔은(八隱)의 한분이시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비롯한 명헌과 도의교(道義交)하셨고, 탁절(卓節)이 백세(百世)에 귀감이었다. 공민조왕에 등과(登科)하여 소감, 예부시랑, 세자이부 겸 중서령, 한림 문학 등을 역임하시며 세 임금을 섬기고 섬나라 왜와 북방의 오랑캐를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당시 고려왕조가 날로 쇠퇴하여 광정(匡正)할 기미가 없자 관직을 버리고 아우 천경(天卿)과 더불어 밀양 향리로 돌아와 스스로 송은(松隱)이라 호(號)하고 산수간에서 시를 읊으며 세월을 소일했다. 이성계(李成桂)가 혁명하여 등극(登極)한 역보(逆報)를 듣고 자탄시를 지어 고려의 멸망을 한탄하셨다. 태조 4년(1395) 국왕이 공조, 형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내려도 응하지 아니하자 다시 예관 권근(權近)을 보내 좌의정으로 특별히 초치(招致)하였으나 맹오(盲聱)라 핑계하고 오징불취(五徵不就)로 죽임을 각오한 채 왕명으로 모두 거절했다. 태조 7년(무인, 1398)에 별세 하셨는데 임종에 앞서 네 아들 융(融), 소(昭), 조(調), 총(聰)을 불러 선천후천(先天後天)은 부자이시(父子異時)라 나는 죽어 혼이 왕씨(王氏) 신하로 돌아가겠지마는 너희들은 새 왕조에 충성하라 유언하셨다. 부음을 들은 조정은 좌의정을 증직(贈職)하고 이듬해 정종 1년(1399)에 충숙(忠肅)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문집초간은 헌종 3년(1837)에 덕남서원에서 발행하고, 1935년 청도의 선암서원에서 중간(重刊)하였다. 1977년과 1999년 두 차례 국역을 하고 초간 목판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351호로 지정되고 2011년에 한국국학진흥원(안동)에 기탁하여 보존하고 있다. 묘소는 밀양시 청도변 고법리 산이며 산 아래에 보본재(報本齋)와 신도비가 있다. 2000년 묘에서 벽화가 발견되고 2005년 국가문화재 사적 459호로 지정되었다. 미루어 생각건대 당시 선생의 위상(位相)이 국내에서 현지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봉향은 덕남, 용강, 신계, 운암서원과 고려충신사이다. 현감 인당 박소 선생(縣監 忍堂 朴昭 先生) 인당선생(1347~1426)은 휘는 소(昭)요, 호는 인당(忍堂)이며, 송은선생의 둘째 아들로 삽포 고향집에서 탄생하셨다. 포은 정몽주선생 문하에서 이학(理學)을 전수하고 아버지 송은선생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효우로 가정의 규범을 삼고 계사(戒辭)를 지어 충신효제(忠信孝悌)를 좌표로 하였다. 삽포에서 신촌(新村, 현 모선동)으로 이거하셨는데 이곳은 춘당 변중량(春堂 卞仲良),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과 같은 동리에서 이학(理學)을 강마(講磨)하고 소요자적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향당장로(鄕黨長老)와 결사수계(結社修稧)하여 춘추로 강회를 열어 향풍진흥(鄕風振興)에 힘썼는데 이 계가 구령동안(龜齡洞案)이며 후일 밀양향약의 기초가 되었다. 안음 현감(현 함양 안의) 재임시에 휼민선정(恤民善政)으로 청백비가 안의 광풍루(安義 光風樓) 부근에 세워졌다. "민포오기기반포, 자기오포포유기, 유래기포관호세,수득천심균포기(民飽吾飢飢反飽, 子飢吾飽飽猶飢, 由來飢飽關乎世,誰得天心均飽飢)" 이란 자관시(自寬詩)에서 휼민, 애민(恤民, 愛民)정신이 잘 표현 돼있다. 묘는 무안면 운정산 백호 등이라 하나 실전되고 선공(先公) 송인당은선생 묘 아래에 우당(憂堂), 인당(忍堂) 형제분의 제단비(祭壇碑)를 각각 세워 춘추로 시향을 받들고 있다. 모선정 경내에 선생의 유허비가 있는데 중재 김황(重齋 金楻)이 찬했다. 문집 원본은 덕남서원에서 간행하고 2007년 국역 증보하였다. 징사 모선재 박수견 선생(徵士 慕先齋 朴守堅 先生) 모선재선생은 휘는 수견(守堅)이요, 호는 모선재(慕先齋)로, 송은선생의 현손이며 인당선생의 증손으로 신촌(현, 모선동)에서 나셨다. 유시부터 천성이 순효(純孝)하고 문사(文詞)가 조달(早達)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다. 점필재 짐종직(佔畢齋 金宗直) 선생의 문인으로 학행이 높았다. 중종 3년(1508)에 모친상을 당하여 구령산(龜齡山, 현 모선산)에 안장했는데 묘옆에서 초막으로 시묘실(侍墓室)을 지어 조석곡전(朝夕哭奠)을 초상 시와 같이 하고, 3년상을 마친 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모선정(慕先亭)이라 편액(扁額)하여 기거하시며 날마다 묘역을 청소하고 성묘하는 것을 일과로 삼아, 종신토록 영모지소(永慕之所)로 정하여 세상의 영욕(榮辱)을 잊고 수학지도(修學指導)에 전념하셨다. 이에 부관(府官)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조정에 올렸던바 참봉(參奉)직을 수차 내렸으나 끝내 사절하고 여생을 마쳤다. 후세 사람들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을 영원히 추모하기 위하여 부근의 산천방리(山川坊里)를 모선(慕先)이라 이름한 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모선정(慕先亭)은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으로 저서 및 문헌과 같이 불타버렸다. 150여 년간 황폐한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었는데 팔세사손(八世嗣孫) 덕계공(德溪公, 諱 增曄)이 제족(諸族)과 함께 성력을 다해 영조(英祖) 연간에 중건하였다. 그 후 수차례 중수하여 보존해 왔는데 2000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285호로 지엊되고 2004년 관비(官費)로 크게 중수(重修)하였다. 역사가 말해주듯 당대명사(當代名士)가 찬(撰)한 모선정기, 모선중건 상량문, 모선정중건운(慕先亭重建韻), 모선정중건기 등이 있고, 모선재선생실기(慕先齋先生 實記) 한권이 있어 선생의 행장(行狀), 사적(事績),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이 전한다. 효는 인륜(人倫)의 근본(根本)이라 모선산이 우뚝 솟아있고 모선계(慕先溪)에 맑은 물이 흐르는 한 이 정각과 함께 선생의 모선정신(慕先精神)이 길이 후세에 전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