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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길쌈을 하게 하여 그 성적을 비교한 일에서도 성스러 운 후 비의 유풍(遺風)을 볼 수 있겠다. ○임오(壬午) 19년-영광(永光) 5년-변한(弁韓)이 온 나라를 가지고 항복해 신라에 항복해 왔다. ○갑신(甲申) 21년-건소(建昭) 2년 고구려(高句麗) 시조 주몽(朱蒙) 원년- 경성(京 城)을 쌓고 이름을 금성(金城)이라고 하였다. ○기축(己丑) 26년 -성제(成帝) 건시(建始) 원년-금성(金城)에 궁궐을 지었 다. 삼가 상고하건데 옛날 임금들은 덕행(德行)쌓는 것을 먼저 힘썼지 성곽(城 郭)이나 궁실(宮室)은 다만 여 사(餘事)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국토를 빙 둘러 성을 쌓아도 성이 몇 자에 불과했고 요(堯)임금의 궁궐은 띠집의 초가였으나 만방(萬 方)을 교화시켰으며 우(禹)임금은 낮은 궁궐에서 천하를 다스렸으니, 그 덕 이 지 극하여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이름붙일 수 없었고 유감이 없었다. 그런데 시조왕 이 즉위한 21년에는 서울에 성을 쌓고 26년에는 또 궁궐을 지었으니 어찌 덕정 (德政)을 먼저 하지 않고 궁궐과 성곽을 먼저 하였는가? 교화가 먼저 행해 져 풍 속이 아름답게 되고 은혜의 정치가 시행되어 백성들이 화합하게 된 후에 경영했 어도 늦지 않았을 것이며 그 성도 반드시 토성(土城)이고 궁궐도 낮아서 후 세 임 금들이 백성의 재물을 고갈시켜가며 높다랗고 화려하고 큰 궁궐을 짓고 장성(長 城)을 쌓은 것처럼 했어야 하는가? 역시 서 민(庶民)들이 아들처럼 달려와 공사를 돕도록 한 것을 본받아야 한다. ○계사(癸巳) 30년-하평(河平) 원년-낙랑(樂浪) 사람들이 침략을 해오려고 하다가 변경(邊境)에 이르러 신라 사람들이 대문을 잠그지 않고 들판에 노적(露積 )이 쌓 여 있는 것을 보고는 서로 말하기를 “도(道)가 있는 나라이니, 침범해서는 안 된 다.”라하고는 군사를 이끌고 철수 했다. ○신축(辛丑) 38년-홍가(鴻嘉) 원년- 왕이 호공(瓠公)을 마한(馬韓)에 보내 수교 (修交)하게 하였다. 마한왕이 호공을 꾸짖기를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두 나라 는 우리 마한의 속국(屬國)인데 근년에 조 공(朝貢)을 바치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도리를 어찌 그처럼 하는가?”하니, 호공이 대답하기를 “우리나라가 두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