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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와 알영이 처음을 바로 하여 후세에 복을 물려준 덕분이니, 참으로 그 아름 다움이 주(周)나라와 짝할 만하다고 하겠다. ○신미(辛未) 8년-한나라 감로(甘露) 4년-왜(倭)가 변방을 침범했다가 왕에 게 신 덕(神德)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에 돌아갔다. ○경진(庚辰) 17년-원제(元帝) 영광(永光) 3년-왕이 육부(六部)를 순행하면 서 농 상(農桑)을 권장하였는데 왕비 알령(閼英)도 따라갔다. ○권근(權近)은 이렇게 말했다. ”농사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옛날에 봄철에 농사를 살펴 부족한 것을 보 태주고 가을에 추수를 살펴 넉넉하지 못한 것을 도와주었으니, 임금의 한번 놀이도 모두 백성을 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 시조왕이 육부를 순행하면서 농사를 권장 한 것은 거의 옛날 농사를 살펴 보태준 법 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러나 부인 (婦人) 은 밖의 일을 하지 않는 법이고 교령(敎令)이 규문(閨門) 밖을 나가서는 안 되니, 왕비가 따라간 것은 예(禮)가 아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중생은 살아가면서 농사가 아니면 굶주리고 누에를 기르 지 않 으면 추위에 떠니,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는 것이 나라의 급선무이지 어 찌 임 금이 위에 있으면서 백성들을 굶주림과 추위에 떨게 하겠는가. 그러므로 주공(周公)은 농사의 어려움을 기술하였고 주례(周禮)에는 친잠( 親蠶)의 일이 실려 있으니, 이 는 윗사람이 그 어려움을 갖추 알아서 아랫사람을 잘 인도 하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시조왕이 전국을 순회하면서 농사를 권장한 것은 왕자(王者)의 어진 정사인 것이다. 친히 몸 소 순회하면서 농사를 권장한 것 이 어 찌 후세에 한갓 권농(勸農)한다는 이름만 있어서 아침에 명령하고 저녁이면 금방 해이해져서 백성들로 하여금 기한(飢寒)에 시달리게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 가? 왕비(王妃)가 따라간 문제에 대해서는 비록 잘한 일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누에를 치는 일을 권장하는 일은 후비(后妃)의 소관이어서 마을의 부인들에게 가 르치려 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유리왕(儒理王) 때에 왕녀(王女)들로 하여금 부내 (府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