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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은 것뿐이랴? 오늘날 서울의 여러 종인들이 영외(嶺外) 여러 종인들 에게 바라는 바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전관이 된 자 가 반 드시 전임 박정원(朴挺源)처럼 일심으로 봉공(奉公)한다면 저의 잘못되어 부끄러 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구구한 말들이 혹 후세에 영원히 전해줄 감계(鑑 戒)가 될지 모르겠다. 참봉 박수겸(朴守謙)이 비각의 역사를 할 때 부지런히 일했 다는 칭찬이 있기에 아울러 언급한다. 아, 종인 박세욱은 송 당(松堂)의 후손으로 사승(史乘)을 참고하여 또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 사재(私財)를 털어 방금 인쇄에 부처 간행하면서 책 이름을 소원 록이라 하여 성조의 신위(神 偉)한 공렬(功烈)이 사람들 이목에 빛이 나도록 널리 배포해 영원히 전할 계책을 도모하였으니,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다고 하겠다. 생각 하건대 나는 나이가 많고 글이 졸렬해서 누락됨이 많은데 어떻게 후세에 전할 문자 를 기 술하겠는가? 산천이 아름답고 만물이 풍부함은 여기에서 논할 겨를이 없다 . 후예(後裔) 정헌대부 전(前)행지중추부사 박치화(朴致和)는 나이 83세에 기 록하고 통덕랑 박경(朴璟)은 쓴다. 숭정 기원후 세 번째 임오년 4월 일에 현판(懸板)하다. 신령스런 사적(靈異事蹟) ○ 가뭄을 당해 시조왕의 능에 비를 빌면 여러 차례 단비가 내렸다. ○ 임진왜란 때 본전을 지키는 수복(守僕) 박언수(朴彦秀)가 피란을 가려고 신전 문 을 굳게 잠그고 돌아서는데 두 발이 땅 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언수가 슬피 빌기를”제가 만약 위판(位版)을 짊어지고 가면 어떻겠습니까?”하였더니 발 이 떨 어져 위판을 지고 선도산으로 숨어 피해 임시로 초가 사당에 모셨는데 왜병 이 방 화하여 불에 다타버렸다. 그 후 나라에서 박언수를 다시 참봉으로 삼았다. ○ 월남리에 입직(入直)한 수호군 세 명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초빈(草殯)했 던 풀 로 불을 피워 쪼이다가 추위가 물러간 후 전(殿)으로 들어갔더니, 갑자기 세 놈이 두 길 되는 담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져 두 놈은 즉사하고, 한 놈은 겨우 죽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