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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 10년 이후에야 전의 참봉 박정원과 박태운 등 이 상 언(上言)하여 계하(啓下)하였는데 그때 마침 나라에 일이 많아서 예조의 복계(覆 啓)를 인해서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해 신사년 10월 초3일에 경주부 윤 홍양한(洪良漢)공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위판을 고쳐썼다. 아, 성스러운 조정의 이번 일은 천년에 한 번 있는 일이다. 처음 빗돌을 캐어 크기 에 맞추어 정(精)한 부분만 남기고 못쓸 부분은 버리어 반드시 미품(美品)을 만든 후에야 그만 둔 자는 누구인가, 부윤 황경원(黃景源) 공이요 이어서 승군( 僧軍)을 동원해서 능 아래로 운반해 갈고 다듬은 자는 부윤 김선행(金善行) 홍익 삼(洪益 三) 공이 전후로 이어서 감독한 힘이었다. 아, 판서(判書)로 일찍이 대제학을 지낸 조관빈(趙觀彬)이 비명(碑銘)을 짓고 지금 의 봉조하(奉朝賀) 원임(原任) 영의정 유척기(兪拓基) 공이 비액(碑額)의 전자(篆 字)를 썼으며 전면의 글씨는 송도유수(松都留守) 홍봉조(洪鳳祚) 공이 쓰고 , 후면 글씨는 홍문관 수찬 박상철(朴相喆) 공이 썼다. 임금의 명이 있 은 후부터 일 에 따 라 지시하고 가르쳐서 잘못이 없도록 한 분 은 금성도위(錦城都尉) 박명원( 朴明源) 과 참판(參判) 박상덕(朴相德)공이다. 아, 비석을 새기다 보 니 여러 해가 바뀌어 기묘년에야 세우게 된 것은 대개 사력 (事力)이 미치지 못함을 연유해서이다. 원비(元碑) 가운데”을해년에 세우다 〔乙亥 立 〕”이라는 석 자는 잘못이므로 고(故) 우참찬 정익하(鄭益河) 공이 지은 음기 (陰記) 가운데서 이미 언급했다. 그 당시 비석을 세운 자는 도 신(道臣) 조 운규(趙 運逵) 공과 부윤 윤학동(尹學東) 공이다. 아, 성조의 후손으로 영남을 구경한 자가 전후해서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만 각릉 을 봉심한 자가 하나도 없어서 마침내 조정에 장계(狀啓)를 올려 청한 자는 마침 내 김상국(金相國) 동당(同堂) 형제가 혹 장계로 청하고 혹은 경연(經筵)에 서 아 뢰어 시작부터 끝까지 힘을 썼다. 그래서 귀부(龜趺)의 높다란 비석이 묘도 에 우 뚝 서게 되었으니 때에는 비태가 있고 일에는 기회(機會)가 있어서 그런 것 이 아 닌가? 아, 비각을 낙성한 것 은 과연 누구의 공로인가? 들보와 기둥은 참으로 조래 (徂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