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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일이 아니겠는가. 우리 당저(當宁) 병인년 영부사 김상로(金尙魯) 공이 영남을 안 절(按節)할 때 순 찰하다 계림에 이르러 친히 붕괴된 각 능을 살펴보면서 능소를 범하여 경작 한 미 련한 백성들을 개탄하는 마음이 일어 비 석 세우기를 청하고 지방관으로 하여금 봄 가을로 봉심(奉審)하는 일을 규정으로 정하라고 하였으니, 성대하고 아 름다운 일이었는데 본도에 계 하(啓下)하자 부윤 정홍제(鄭弘濟) 공이 흉년이 들었다 고 영 문(營門)에 보고해 즉 시 거행하지 않으면서 6,7년이나 미루었으니 애석하게 명을 폐치(廢置)한 것이 어찌 이에 이른단 말인가? 아, 성조의 자손 숫자가 억만 명뿐이 아닌데 서울 밖을 바라보면서 비록 이 에 마 음을 쓴 자가 바로 전 참봉 박태운(朴泰運)으로 홀로 걱정하고 탄식하였지 만 영 남의 한 한사(寒士)가 어쩌겠는가? 천리 먼 길을 발로 싸메고 서울로 가서 객지 밥을 먹으며 여러 종인들에게 두루 의논하니, 그 가운데 더러는 뜻을 같이 해 호 응하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수방관 하였다. 박태운이 스스로 일이 성 공하지 못하면 다시는 조령(鳥嶺)을 넘어 돌아가지 않겠다고 생각하여 기갈(飢渴 ) 한서 (寒暑)를 따지지 않고 많은 세월을 허비해 소청(疏廳)을 설치했다. 그러자 소문을 들은 종인들이 조금씩 찾아와 함께 궁궐에 나아가 호소할 의논을 하기도 했으나 지위가 높은 중신들은 혐의(嫌疑)하지 않아도 좋을 혐의를 빙계대면서 소두 (疏頭) 를 규피하였다. 신미년 7월 22일에 고(故) 좌윤(左尹) 필정(弼正)이 당시 군직함을 띠고 있 었는데 몸을 떨쳐 일어나 종 인 수백 명이 서명한 상소문을 가지고 궁궐로 가니, 승정원 에서 가로막고 상소문을 즉시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지금의 북백(北伯) 조명정 (趙明鼎) 공이 경주부윤으로 있다가 갈려서 조정으로 와 곧 승정원으로 들 어오게 되었다. 공이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상소문을 받아주어 임금께서 묘당 (廟堂)에서 아뢰어 처리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그 당시 영의정 김재로(金 在魯)씨 가 경연(經筵)에 나아가 아뢰니, 임금이 하나같이 모두 아뢴 대로 윤허하셨 다. 아, 상소하여 청하는 범절(凡節)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런데”왕(王)”자로 고쳐야 하는 일을 아주 오래 끌어와서 여러 사람들의 억울해 하는데도 예조에서 예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