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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 알영씨는 출생할 때 알영정의 용이 상서를 나타냈으며 자라서 성덕( 聖德)이 있어 왕비로 삼으니, 마치 하늘이 문왕을 탄생하고 또 태사를 낸 것과 같아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두 성인이라고 부르니, 대아(大雅)에서 이른바”하늘이 배위 를 내니, 받은 명이 굳게 되었다”라고 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아, 옛날 제왕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덕이 있으면 반드시 영원히 높이 받들 어 보 답할 전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周)나라의 청묘(淸廟)는 문왕의 덕을 칭송하 고 아울러 바삐 수고한 선비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이요 비궁은 노후가 수개 (修改)한 일을 읊으면서 위로 강원(姜嫄)과 후직(后稷)까지 언급했으며 상송 (商頌) 의 현조(玄鳥)와 장발(長發)에 이르러서도 역시 상(商)나라 사람들이 그 소생을 서술하면서 천하를 소유한 처음까지 언급한 것이니, 어찌 칠묘(七 廟)에서만 그 덕 (德)을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군다나 우리 성조의 모책(謀策)과 공적( 功績)은 위로 하(夏) 상(商) 주(周)를 계승한다고 해도 부족할 것이 없고, 아래로 한(漢) 당(唐) 송(宋)나라에 비교해도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다만 여 러 차례 벽 해상전 (碧海桑田)의 변을 겪어서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는데다가 중간에 세대가 교체된 것이 무릇 몇 번이어서 장차 시조왕의 외로운 분묘가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는 탄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반드시 주무왕 같은 성왕이 나 온 연후에야 끊어 진 것을 잇는 성덕(盛德)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세종대왕은 성스러움이 주무왕과 같아서 전대를 잇지 않고 비로소 묘전을 짓고 향축을 내려 제사를 지내도록 하셨다. 그러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 일어 나 전각 역시 불에 타버렸는데 앞서 수복(守僕) 박언수(朴彦秀)가 위판을 지 고 산 속으로 숨어서 백세 부조묘의 신주가 다행이 불길을 피할 수 있었으니, 기 한 일 이다. 마땅히 조서로 후세에 전하여 난리에 나라를 등진 자들을 격려해야 하는데 아직껏 포상하는 전례가 없으니 탄식을 이길 수 있겠는가? 지난 경종대왕 3년에 특별히 숭덕전이란 호를 내리고 또 참봉을 두었으니 , 대개 미자(微子)의 “덕 는 이를 높이고 어짊을 닮은 자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라 는 뜻 을 취한 것이다. 또 후손 유생 91명을 정원으로 하여 번갈아가며 숙직을 하 게 했 으니, 나라에서 숭봉하는 사체가 전에 비 해 더욱 자멸하다 하겠으니 어찌 아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