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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있으니 왕의 옥적과 금척은 다만 물건을 보고 감상이 이는 것은 자 연스런 이치이니, 피리나 금척이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만 유민들이 감동하여 추 모하는 밑천으로는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말미에 언급하여 후일 잘 기록 해 줄 군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후손 부수찬(副修撰) 신(臣) 박상철(朴尙喆)은 왕명을 받들어 짓고, 경상도 관찰사 신 조운규(趙雲逵)와 경주부윤 신 윤학동(尹學東)은 왕명을 받들어 비석을 세운다. 숭정기원(崇禎紀元) 후 세 번째 기묘년 정월 29일 세움. 숭덕전 전 참봉 박정원(朴挺源) 박태운(朴泰運)등의 상언(上言) -경진년(庚辰年) 4월 일 대개 본전(本殿)의 위판을 고쳐 쓰 는 일과 비석을 세우게 된 사 적 기록 및 그 나 머지 의문(儀文)은 한결같이 숭인전과 숭의전 두 전각의 예에 의해 하라는 명을 특별히 이미 내리셨습니다. 비석은 나라에서 조치해준 재력으로 간신히 세 웠는데 그 당시 비문을 지은 문형(文衡)의 신하가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지으면서 신주 에 왕자를 넣어 고친다는 뜻을 이미 비문 가운데 언급하였는데 예관(禮 官)에게 명하여 신주를 고치는 한 조항은 해조(該曹)에서 아직껏 거행하지 않아 10 년이나 오래 미루고 있어 고 칠 기약이 없습니다. 당초 왕명에 한결같이 숭인전과 숭의전 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고 하여 해조에서 경기(京畿)및 기영(箕營)에 공문을 보내 두 전(殿)의 절목을 등사하여 보내라는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엄히 신칙하 여 지 체 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비석은 이미 세웠으나 비각이 없어 풍우에 씻겨서 기록한 문자가 오랜 후에 는 마 멸될 우려가 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닙니까? 숭인전의 절목을 상고해 보았더 니 한 칸에 집에 불과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비각을 건립하게 하소서 . 본 전 의 참봉은 전번 처음 내린 절목에 시조왕의 자손 가운데서 지식이 있는 사 대부로 차출하라고 하였는데 근래 형편없는 무리들이 연줄을 타고 차출되기를 꾀하 니 이 역시 절목에 차출하여 어지러운 폐단을 없게 하도록 특별히 천은(天恩)을 내려주 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