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page

전 참봉(前參奉) 박태운(朴泰運) 상서(上書) 무오년(戊午年) 8월 초1일 삼가 아룁니다. 신라 시조왕은 하늘이 낸 신성으로 동경(東京)에 나라를 세 운 큰 업적을 세운 삼한의 맨 처음 임금으로 오랫동안 높이 받드는 전례(典禮)가 빠져 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열성조에서 특별히 삼각(三恪)의 뜻을 생각하시어 세종 대왕 11년에 전묘(殿廟)를 창건하고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받들고 경 종대왕 계묘년에 숭덕전이란 묘호를 내리고 을축년에 지그믜 좌의정 신(臣) 김상 로(金尙 魯)가 영남을 안절(按節)할 때 장계로 능묘(陵墓)에 비석을 세우고 수호( 守護)하 는 군사를 정해 주어 지방관이 봄가을로 봉심하기를 청하니 나라에서 한 결같이 장계에 의해 시행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이루부터 의문(儀文) 제도가 아주 새롭게 되어 길가는 사람들의 탄식을 면하게 되었으나 이런 모든 일을 해조(該曹)에 내렸으나 해조에서 즉시 거행하지 않고 위판(位版)에”왕(王)”자를 빠뜨리고 쓴 것이 실로 큰 흠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미 년 진신(縉紳) 장보(章甫)로서 시조왕의 경외(京外) 자손들이 합소(合疏)하여 진청 (陳請)했더니 묘당에서 품처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지금의 봉조하(奉朝賀) 신 김재 로(金在魯)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연석에서 품달(稟達)하니 특별히 허락하 셨으니 이는 실로 수 천년 동안 거행하지 못한 전례로서 문형(文衡)신하가 왕명을 받들 어 비문을 짓고 비국에서 재력을 조치해 주었기 때문에 비석과 좌대석을 한번에 떠 오는데 비석을 즉시 운반해 들여와 다듬은 후 이미 공사를 마쳤으나 좌 대석은 아직 운반해 오지 못했는데 영남에 연달아 해마다 기근이 들어 아직까지도 능에 서 멀지 않은 가까운 곳에 두고 있었는데 금년은 조금 농사가 잘되었으니 농한기 를 이용해 운반해다 세울 바탕을 삼아야 합니다. 위판을 고쳐 쓰라고 하명 하셨으 니 예조에서 예에 따 라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한 후 마땅히 고쳐야 합니 다. 또 당초 한결 같이 숭인전과 숭의전 절목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셨는데 해 조에서 아직껏 본도에 알리지도 않고 있으며 조정에서 참봉 두 명을 차출하여 수 호하라 고 한 것 성상의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닌데도 혹 서울이나 다른 도(道) 사람 을 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