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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王)자를 넣어 고쳤으며 본전 참봉은 이조에서 의망(擬望)해서 기한이 차 면 승 진했으며 묘도비문은 사신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했으며 비석에 드는 물력(物 力)은 나라에서 조치해 주고, 모든 절목(節目)은 한결같이 숭의전의 예에 의 해 정 식(定式)하여 시행하는 것으로 입달(入達)하여 본조에서첩(帖)이 본전(本殿 )에 내 렸습니다. 그래서 임신년 2월 경유사(京有司) 박현정(朴顯禎)이 와서 비역 (碑役) 을 감독하고 빗돌 운반은 열 고을의 승군(僧軍)을 얻어 전각 옆으로 운반 했습니 다. 그 나머지 돌을 다듬고 글자를 새겨 세우는 인부를 마련하는 일은 영문 (營門) 에 보고하고, 영문에서 장계해 호조(戶曹)로부터 3분의 1을 감해서 조치해 주었 습니다. 그래서 경유사(京有司)가 비역(碑役)을 하는데 사용하게 되었으나 지금까 지 미루어졌습니다. 좌판(坐板)및 두 개석(頭蓋石)은 10리 남짓되는 지점에 있는 데 아직 운반하지 못했으며 박현정이 상(喪)을 당해 올라갔는데 오래도록 내려오 지 않고 있어 전 참 봉 박성도(朴聖道)가 본도와 본부에 논보(論報)하였으나 모두 을병(乙丙)의 참혹한 흉년으로 승군 징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서 정미년 에 운 반하려다 임기가 차서 떠났습니다. 전관(殿官)이 이달에 새로 제수되어 도 임해서 비에 관한 문서를 자세히 상고 했더니 나라에서 조치해 준 베와 쌀, 돈 세가지 조목의 돈이 1천4백20냥5전인데 그 가운데 음기(陰記)를 지는 예폐(禮幣 ) 값이 20냥이요 진사가 의례 쓰는 종이와 밀(蜜), 장황(粧䌙)하는 값이 90냥이요 , 유사 (有司)가 가지고 간 것-유사가 말하기를 이는 읍리(邑吏)의 무고(誣告)이며 크고 작은 색량(索量) 밀가(蜜價) 1백 60냥을 읍리에게 유치(留置)했다고 합니다 . -기타 는 모두 비석 세우는 일에 사용하고 나머지 23냥이 남아 있으나 비각및 정자각 에 들어가는 물력을 아직껏 얻지 못했으니 나라에서 조치해 주어야 합니다 . 전관이 이달 초3일 15릉을 봉심했더니 시조왕릉은 본전 뒤 남 정(南亭) 숲 안에 있는데 원래 양마석표(羊馬石表)나 정자각이 없고 능의 형상이 높고 큰데 사초 (莎草)가 약간 시들고 무너졌으며 남해왕과 유리왕 파사왕 능은 같은 숲속 에 있 는데 역시 표석(表石)이 없으며 탈해왕 석 씨 능은 부(府)북쪽 표암(瓢巖)에 있는 데 원래 비석이 없고 능의 형상이 무너졌으며 1백 보 이내에 여러 무덤들이 총총 하게 있습니다. 경애왕 능은 부 남쪽 10리에 있는데 세 능의 골짜기가 몇 리(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