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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봉(參奉)이 예조(禮曹)에 보고한 계(啓) 경상도 경주 숭덕전에서 보고합니다. 본릉(本陵)은 바로 신라 시조왕의 사 당입니 다. 우리 세종 장헌대왕 11년에 처음 시조왕의 능 옆에다 사당을 지어 위 전(位田) 5결(結)을 두어 수용에 쓰게 하고, 양민 여섯 집을 복(復)하여 나무하고 풀하는 것을 금지하고, 봄 가을로 향축(香祝)을 내 려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다 불행하 게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각이 불에 타버려 무오년에 새로 중건하고 경종 3년에 특별히 숭덕전이란 오 를 내려 달고 비로소 참봉을 두고 모든 절목(節目)을 한결 같이 숭의전의 예를 따르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러다 금상(今上) 병인년 2월 본 도 감사의 장계(狀啓)를 인하여 신라시대의 무너진 여러 왕릉으로 모두 수 리하고 단갈(短褐)에다”신라 어느 왕의 능〔新羅某王陵〕”이라고 새기되 물력(物力 )은 나 라에서 조치해 줄 것이며 사표(四標) 안은 1백 보(步)를 한하여 경계를 정하고, 그 안의 경작지는 모두 평지로 깎아 농사를 못 짓게 하며, 각릉에는 2,3 명씩을 두어 영원히 연역(烟 役)을 면제해 주어 전적으로 마음을 다해 수호하게 하 며 매 년 봄가을에 지방관이 친히 각릉을 봉심(奉審)하여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구별하 여 장계로 보고할 것이며 탈이 있으면 향 축(香祝) 내려주기를 청하여 날짜 를 가 려 수개(修改)하는 일 을 착실히 구정으로 정해 본조(本曹)로 하여금 아뢰어 분부 하라는 일을 장계해서 본조가 품달(稟達)해 같은 해 6월 초9일 우부승지 신사건 (申思建)이 담당하여 그렇게 하라는 윤허를 본도에 공문으로 보냈습니다. 이 에 부 윤(府尹) 정홍제(鄭弘濟)와 차사관(差使官) 흥해군수 김덕휘(金德輝)가 상세 히 여 러 왕릉을 봉심하여 퇴락 여부를 주(註)를 달아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 첩 (牒) 가 운데 28곳을 봉분을 고치거나 사초(莎草)를 다시 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돌 을 운 반하는 일이 매우 호 대(浩大)하였습니다. 또 금년의 일은 임계년 보다 더 심해서 백성들을 동원하기가 매우 어려우니, 명년에 거행할 것을 첩보(牒報)했으나 도신 (道臣)이 보리가을을 기다렸다가 거행하자는 뜻으로 장계를 올렸으나 그 후 머뭇 거리며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미년 7월에 후손 사직(司直 ) 박필 정(朴弼正) 등이 상서(上書)하여 8월20일에 영의정이 아뢰어 시조의 위판( 位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