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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56년 후 신라에 속 한 곳이며 함양,죽산,상주는 사벌국으로 신 라 첨해왕이 취하 여 군으로 삼아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니 나누어 다스린 후 8백 10년에 신라에 속했으며 전주는 경덕왕 15년에 지금의 이름을 고쳤으며 나누어 다스린 4백49년에 신라에 속하였으며 순천은 고려 충선왕 2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 으며 나누어 다스린 후 55년에 신라에 속했으며 경주는 신라의 고도(故都 )로 고 려 태조 18년 경순왕이 항복함으로써 경주를 제수한 것이다. 또 보면 탈해왕 11년 정묘(丁卯)에 고구려 백제가 각기 한쪽씩 차지하고 있어서 죽성(竹城)은 고구려 땅이었으며 완주와 승평은 백제 땅이었으니 탈해왕이 이웃 나라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자 하더라도 이웃나라가 어찌 기꺼이 받아 들였겠 는가? 이로써 본다면 신라가 통합한 후 8군(郡)을 나누어 봉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여러 박씨와 한 세상 사람을 사서 기록되지 않은 바로 모두 패설(稗 說) 잡 기(雜記)라고 한다면 사서에 단지 유리왕이 두 아들이라고만 말하였는데 갑자기 여섯 아들을 더하여 스스로 분명한 증거라고 하면서 여러 사서를 현란(眩 亂)시키 는 것은 어느 사서에서 나온 말이라고 할 것인가? 동사(東史)및 회강(會綱 )을 상 고하여 보면 경명왕이 승하하였다고 한 다음”후사가 없어서 〔無嗣〕”란 두 글자 의 목(目)에 이르기를”왕이 나라 말년을 당하여 겨우겨우 후사를 이어갔다 ”라고 하였으니 왕위를 동생에게 전했는지 아들에게 전했는지 어떻게 결정하겠는 가? 기 유년에 홍만종(洪萬宗)이 지은 역대총목(歷代總目)에만 경명왕이 후사가 없 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지금부터 48년 전 일이다. 그 당시 분명하게 하 지 않아서 불분명 한 말이 있게 된 것이며 밀양구보(密陽舊譜)는 국초(國初)에 이루어진 것이 다. 만 약 여러 사서에 근거가 있다면 잘못된 보첩을 믿지 말고 고쳐야 마땅하다 . 역대 총목 가운데 아달라왕이 후사가 없다고 하였는데 신덕왕은 아달라왕의 원 손(遠孫) 이니, 홍만종이 후사가 없다고 한 것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이제 각파 의 분 봉(分封)된 성향(姓鄕)으로 말하자면 신라가 통합한 후의 일임이 분명한 근거가 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진달한 바는 고루(孤陋)한 소치인데 이런 망발 로 식 견이 있는 군자(君子)에게 질의하노니, 반드시 소견이 있을 것이다.-초출( 抄出)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