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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년(壬申年) 8월 19일 변증록(辨證錄)을 가지고 상서(尙書) 조관빈(趙觀 彬) 공 을 곡강(曲江) 거소(居所)로 찾아 갔더니 말하기를”내가 당초 장록을 지을 때 범 연(泛然)하게 보아 넘겼었다.”라 하고는 변증록을 다 보고나서”팔대군이 경명왕 때 나온 것이 아님이 이처럼 분명하다. 탈해왕 석씨가 종척(宗 戚 ) 박씨로 하여금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 것이 동사(東史)에 기록되어 있으니, 박 씨들이 봉읍(封邑)되어 관향이 나뉜 것이 과연 이때에 있었으며 경명왕 때 나왔다 고 한 것은 참으로 망발이다.”라 하고는 초책(草冊)과 정서본을 가져다가 박씨가 10세 동안 왕위를 전했다는 “십(十)”자를 “팔(八)”자로 고치고, “경명왕의 아들 팔대군 〔景明之子八大君八〕의 여덟 글자를 삭제하고 그 근원이 유리왕 때 여덟 공자로 부터 나왔다〔其 源出自儒理時有八公子〕”라고 써넣었다. 그리고는 또 말하 기를” 비문의 서본(書本)을 이처럼 고쳐서 경주로 보내려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 지평 (持平) 기채(起彩)와 상의하여 그 서본을 가지고 송도의 홍상(洪相)에게- 홍봉조 (洪鳳祚)가 이때 개성유슈(開城留守)로 있었다-왕복하여 글씨체가 크고 작 아 들 쭉날쭉하지 않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팔대군의 분봉설(分封說)과 박황간(朴黃澗)의 변증하는 글은 밀성군의 후손 박기 래(朴起來)가 지었는데-이 아래주(註)-이번 나라에서 신라 시조왕의 비석을 세우 면서 황간(黃澗) 박두익(朴斗益) 어른이 비문 중에서 뽑아내어 박씨의 분파 (分派) 근원이 잘못된 사실을 변증하여 가지고 와 보여주는데 나의 견해와 크게 다르기 때문에 전후 여러 차례 왕복하였는데 그때 논의된 바는 대개 다음과 같다. 함양보에 기록된 유리왕의 팔공자에서 근원한다는 설은 분명한 근거가 있 다. 탈 해왕이 종척 박씨들로 하여금 주군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하는데 식견이 있 는 자 라면 30년을 1대(代)로 계산하게 마련인데 37대라고 하면 잘못이기 때문 에 혹 다른 빈어(嬪御)의 소생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두 아들 이외에 다른 소생이 라 하 기도 하며 혹은 사서에 기록된 바 없다고 하기도 하는데 모두 패설잡기(稗 說雜記) 에 불과하다. 혹은 조상이 아닌데도 조상을 삼아서 사체(事體) 도리(道理)등 의 말 로 꾸짖는 기괴한 일을 하고서 스스로 식견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는 어느 사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