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page

금성(錦城)등 열두 읍(邑)의 계파에 대해서는 내가 논할 바가 아니지만 팔 공자(八 公子)의 후예들이 각 기 그 봉읍(封邑)으로 관향(貫鄕)을 삼고 있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음을 명백히 밝히는 바입니다. 이에 사 기(史記)와 세보 (世譜) 가승(家乘)을 참고하고 중국의 사서는 위로 한기(漢紀)부터 아래로 《고려 사(高麗史)》에 이르기까지 참고하여 한기록을 만드는 바이다. 대개 시조가 나라를 세운 것은 한선제(漢宣帝) 오봉(五鳳) 원년이었는데 역년(歷 年)을 계산하고 세대를 증험하며 서책을 참고하여 사실을 뽑아서 한문공( 韓文公) 의 휘변(諱辯)의 뜻을 취하는 바입니다. 비문 가운데 박씨가 십세(十世) 동안 왕위를 전했다고 한 “십(十)”자는 “ 팔(八)” 자로 고쳐야 합니다. 박씨왕이 10세를 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서문(序文)의 문세 (文勢)가 이미 시조왕과 남해왕 양세(兩世)는 언급했으므로 유리왕부터는 마땅히 8세가 되니, 8자로 고쳐야 함이 십분 분명합니다. 비문 가운데”그 근원이 경명왕 의 아들 팔대군에게서 나왔다.”라고 한데 대하여 이는 분명 그렇지 않음을 모두 남김없이 환하게 변중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금성(錦城) 등 열 두 고을을 박씨 의 본관으로 삼은 것은 왜 그렇게 한 것인지 모르겠으며 팔대군의 후손에게 도 어 찌 천만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경명(景明)”이란 두 글자는 “유 리(儒理)”로 고치 고,”지자(之子)”두 글자는”시유(時有)”두 글자로 고쳐서 그 근원이 유리왕 때 팔 공자로부터 나왔는데 장자는 누구, 차자는 누구라고 밝혀서 쓰면 다만 여덟 글자 만 고칠 뿐이며 상하의 문세(文勢)를 보아 조금도 틈새가 없고 글자를 늘 리거나 줄이는 폐단이 없게 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태학사(太學士)께서 왕명을 받들어 지은 글이니 만큼 참으로 나의 좁은 소견이 용납되지 않을 정밀하고 엄중한 작품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처럼 한 단락 을 고 쳐주기를 청한 것은 오로지 장록이 잘못된 데서 비롯된 것이니 어찌 번거로 운 것 을 혐의하여 모른 체 그대로 두어 영세토록 전할 금석문(金石文)에 잘못된 내용 을 새기도록 하겠습니까? 참람한 줄 알면서도 이처럼 감히 아뢰니, 바라옵건대 살펴주시어 아무쪼록 큰일 에 유감이 없도록 해주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