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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는데 더군다나 비문(碑文)의 경우이겠습니까? 시조왕(始祖王)의 묘비명(墓碑銘)을 청한 장록(狀錄) 가운데 밀성군(密城君 ) 8형제 가 경명왕(景明王)에게서 나왔다는 말이 비록 누구의 손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지 만 크게 착오되었습니다. 동사(東史) 탈해왕(脫解王) 10년에”박씨 종척(朴 氏宗戚) 에게 주군(州郡)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라는 글이 있고, 8공 자(公子) 봉읍(封 邑) 이름이 함양보(咸陽譜) 전기(傳記)에 분명하게 실려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 를”유리왕(儒理王)이 남해왕(南解王)의 유명(遺命)을 들어 석탈해(昔脫解)에 게 전 하면서”짐에게 두 아들이 있으나 그 재주가 미치지 못한다.”라 고 하였다. 또 탈해 왕 때에 비록”박씨의 종척으로 하여금 주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라 는 글 이 있더라도 “팔공자(八公子)”라는 세 글자가 사서에 나타난 곳 이 없으니, 자상하 지 못하다.”라고 하여 이로써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덕왕( 神德王) 경명왕(景明王) 때 8대군을 분봉(分封)했다는 글은 어느 사책에 실려 있다는 것입 니까? 탈해왕 10년에 종척(宗戚) 박씨로 하여금 주군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면서 ”주주 (州主)” “군주(君主)”라고 불렀다는 말이 동사(東史)에 실려 있으니 함양보 (咸陽譜) 에 실려 전하는 내용이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밀양보(密陽譜)의-밀양보 는 2본 (本)에 있으니, 윗글에 보인다.-8대군이 경명왕 소출이란 내용은 실로 그 출처내 력(出處來歷)이나 사승(史乘)의 근거가 없습니다. 또 “경명왕이 훙하고 사자 가 없 었다.”〔薨無嗣〕”세 글자는 믿을 만한 사서가 아니고 다만 역대총목(歷代 總目)에 만 나온 글이어서 자세하지 못합니다. 또 8군(君)이 경명왕의 소출이란 증 거라고 하는”신덕왕(神德王)이 훙하고 사자가 없어 아달라왕(阿達羅王)의 원손(遠 孫)”이 란 내용도 역사에 자상하지 않으니, 과연 의심되지 아니합니까. 그렇다면 함양보 (咸陽譜) 제1세(弟一世) 휘(諱) 선기(善己)는 경명왕 이전 3백여 년 전 사 람인데 경명왕의 사자가 있고 없는 것이 8군과 무 슨 상관이 있기에 갑자기 사서에 없다 고 의심을 하는 것입니까? 무릇 이런 논의를 하는 자들은 어찌 사씨(史氏 )의 논 의를 보지 않는 것입니까? 고려 태조(太祖)가 삼대(三代) 이상에게 시호( 諡號)를 추증했다는 견해는 김관의(金寬毅)와 민지(閔漬) 등의 설에서 비롯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