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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며 보배로운 구슬이 빛이 나서 사림(詞林)의 추당(秋棠)과 같습니다. 이에 임금 의 윤허를 받아 감히 비에 새길 명(銘)을 청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특별 히 여 정(輿情)을 살피시어 사양하지 마시고 쾌히 허락하여 빛나는 글을 지어 동경(東 京) 백세 성왕(聖王)께 서 남긴 빛을 남쪽 지방에 빛나게 해서 어 린 부인들 까지도 감탄을 하고 자손들이 머리를 모으고 가슴 가득히 감격하게 해주시면 그 한 글자 의 가치가 비단 1천 필은 될 것이니 감히 필봉(筆鋒)을 따지겠습니까? 글 을 온 나라에 전하면 거의 낙양(洛陽)의 지가(紙價) 문득 높아질 것입니다. 신라 시조왕(始祖王) 묘비명(墓碑銘) - 서문(序文)을 곁들임 아아, 이곳은 신라 시조왕(始祖王)의 묘(墓)이다. 지난 세종(世宗) 11년(서기1429) 에 비로소 사당을 지었으니 대개 주(周)나라 삼각(三恪)의 뜻을 취한 것이요 경종 (景宗) 3년(1723)에 또 숭덕전(崇德殿)이란 이름을 내렸으며 우리 성상(聖上) 27 년에 위판(位版)에다 왕(王) 자를 쓰고 비석을 세우고 관각(館 閣)의 신하로 하여 금 비문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다. 이는 시조왕의 후손 여러 박씨들이 상소하여 쓰기를 부탁하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동국(東國)의 역사책과 장록(狀錄)을 살펴보건대 왕의 성은 박씨요 휘(諱)는 혁거세(赫居世)인데 한(漢)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년 임자(壬子 서기전 69년)에 출생하였다. 13세 때 어른처럼 커서 6촌장(村長)의 추대를 받아 임금으로 즉위하 여 호를 거서간(居西干), 국호를 서라(徐羅)라고 하니, 이때가 오봉(五鳳) 원년 여 름 4월이다. 이보다 앞서 고조선(古朝鮮)의 유민(遺民)들이 동 해(東海) 바닷가에 나누어 살면서 6촌(村)을 이루었는데 임금이 없었다. 고허촌장(高虛村長)이 양산 (楊山) 기슭의 나정(蘿井) 숲 속을 바라보니 이상한 기운이 감돌면서 마치 선인 (仙人)이 절을 하는 형상이 있었다. 가서 보니 박처럼 생긴 알 하나가 있기에 쪼 개 보았더니 안에서 어린 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이에 동 천(東川)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모여들어 춤을 추 는 것이었 다. 6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