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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를 쓰지 않는 것 은 잘못이니, 진달한 바에 의해 위판을 고 쳐 쓰게 하고 , 비석 을 세우는 일은 이미 대조(大朝)의 을축년 성명(成命)이 있습니다. 사적을 기록하 는 글을 반드시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하라는 일 역시 진달한 바에 의해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한결같이 진달한 바에 의해서 시행하 라.”고 답하였다. 대제학(大提學) 조관빈(趙觀彬) 공에게 비문을 청하는 글 소수(疏首) 전(前) 승지(承旨) 박필정(朴弼正), 유사(有司) 지평(持平) 박기 채(朴起 采) 진사(進仕) 박추(朴錘) 박춘신(朴春新)은 삼가 비석을 세우는 일을 세자 (世子) 께 호소하여 유음(兪을音 )받았습니다. 사 책(史冊)을 참고하여 비문 짓는 일 을 경 월(卿月)께 부탁하오니, 아름다운 사실을 기록하여 묘도(墓道)를 빛내 주십 시오. 생각하건대 우리 신라 시조왕은 하늘이 내린 신인(神人)으로 한(漢)나라 지절(地 節) 임자년(壬子年) 6부의 군장(君長)들이 추대하여 나라를 열었습니다. 왕이 즉위 하자 이웃 사방 나라의 강적들이 흉포함을 거두고 인(仁)을 사모하여 귀화 (歸化) 해 왔습니다. 용이 절 을 하는 이적(異蹟)이 있어 성스러운 배필을 나정에서 맞이 하고 옥저(沃沮)가 양 마(良馬)를 바쳐온 것 은 덕정(德政)을 베풀자 월상( 越裳)이 꿩을 바쳐온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무 릇 61년 재위에 9백여 년 나라를 유지했 으며 박씨 10왕의 자손들이 번창하고 26개 여러 파가 가장 성하였습니다 . 오릉 (五陵)의 시든 풀이 묵은 것을 보고 억조(億兆)의 유민(遺民)들이 한숨을 쉬었습 니다. 지난 우리 세종(世宗)께서 전례(典禮)를 행하시던 날 숭덕전이란 호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신판(神版)을 바라보면 아직도 한 왕(王)자가 빠져 있으 며 묘 도(墓道)에도 여섯 자 높이의 비석이 없어서 수많은 자손들이 궁궐 뜰에서 호소 하여 천지가 그 정성을 살피시어 구중궁궐에서 윤허가 내리니 해와 달처럼 빛이 납니다. 단군(檀君)의 사당 가에 어찌 지키는 침랑(寢郞)이 없어야 되겠으며 기자 (箕子)의 묘 앞에는 마땅히 비석이 서야 합니다. 태학사(太學士) 합하(閤下 )께서는 벼슬이 팔좌(八座)로 높고 문장(文章)의 맹주(盟主)이시어 문단(文壇)에 글이 넘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