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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박씨(新羅朴氏) 소원록(遡源錄) 후손 밀양(密陽) 박세욱(朴世旭) 집록(輯錄) 신라연보(新羅年譜) 삼가 상고하건데, 시조(始祖)께서 창업(創業)한 이래 나라 이름을 정하지 못해서 혹 사라(斯羅), 혹은 사로(斯盧), 서라(徐羅), 신라(新羅)라고 불렀다. 그러다 22세 를 전해 내려와 지증왕(智證王) 4년 계미(癸未)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상언(上 言)하여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자고 하였는데 대개 “신(新)”이란 덕업( 德業)을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었다. 또 상고하건대 진한(辰韓)은 마한(馬韓) 동쪽에 있었는데 진(秦)나라 사람들 이 전 쟁을 피해 한(韓)으로 들어오자 한이 동쪽 경계를 떼어서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언어가 진나라 사람과 비슷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경 상도(慶 尙道)는 본래 진한(辰韓)의 땅인데 후에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또 상고하건대, 《삼국본사(三國本史)》-신라(新羅) 고구려(高句麗) 백제(百 濟)-에 모두 선왕(先王)이 승하한 해를 사왕(嗣王) 원년(元年)이라고 하였는데 고 려 때 신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으면서 그대로 두고 고치 지 않 았다. 논(論)하기를 “임금의 즉위(卽位)는 해를 넘겨서 원년(元年)이라 일컫 는 것 이 선왕(先王)의 바꿀 수 없는 법이여서 선왕의 마지막 해, 즉 새 왕이 즉위 한 해 를 원년이라고 일컫는 것은 잘못이다.”라 고 하였다. 우리 조선 예종(睿宗 ) 때의 사신(史臣) 서거정(徐居正)등이 삼국사(三國史)를 지으면서 이 를 고쳐서 임금이 죽은 명년을 원년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 연보(年譜) 역시 즉위한 이듬해 를 원 년이라 일컬어 감히 춘추(春秋)의 1년에 두 임금을 두지 않는 뜻을 따른다 . 또 본사(本史)를 상고하건대 그 임금을 거서간(居西干), 또는 차차웅(次次 雄), 또 는 자충(慈充), 또는 이사금(이師今)이라 일컫다가 지증왕(智證王) 때에 이 르러서 야 비로소 왕리라 일컬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연대력(年代曆)을 지으면서 모두 왕이라 일컬었고 김부식이 본사(本史)를 인하여 곧바로 썼다. 권근(權近)은 《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