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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군(八君) 분봉시변(分封時辨) 함양박씨세보(咸陽朴氏世譜) 전기에 이르기를”탈해왕(脫解王) 정묘년에 종 척(宗戚) 박씨(朴氏)의 공자(公子)들을 봉(封)하였는데 그 각주(脚註)에”유리왕(儒 理王)의 아들이기 때문에 종(宗)이라 말하고, 처의(處義)가 있기 때문에 척(戚)이라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조(中祖)로 나뉘는데 휘(諱) 척(戚)의 후예(後裔) 보기(譜 記)는 8군(八君)에 속한 경명왕(景明王)의 아들이다. 신미년 상소를 올릴 때 에 진 신유사(縉紳有司)가 지금의 집의(執義) 박기채(朴起采)였는데 또 박황간(朴 黃磵)과 왕복 논쟁하면서 기술(記述)한 바가 많기 때문에 아래에 부록한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조(中祖) 휘(諱) 현(鉉)의 후예(後裔) 보기(譜記)는 두 차 례 지난 임인년(壬寅年)에 만들었는데 그 보첩 권수(卷首)에 이르기를”세상 에 전 하는 팔대군분봉설(八大君分封說)은 징험할 만한 문헌이 없어서 어느 시대 에 분 봉했는지 알 수 없으며 대군들도 어느 왕의 왕자이자 모른다.”라고 하였다 . 삼가 동사(東史)를 상고하건데 탈해왕(脫解王)은 남해왕의 사위인데 난명( 亂命)을 인하여 즉위해서 종척(宗戚) 박씨들을 주군(州郡)에 나누어 보내 다스리게 했는데 이는 대개 멀리하기 위한 것으로 당시 주 주(州主) 군주(君主)란 칭호가 있 었으니, 8군의 분봉(分封)이 혹시 이때에 있지 않을까 싶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중조(中祖) 규정공(糾正公) 휘(諱) 현(鉉)의 후예(後 裔) 진 사(進士) 박동현(朴東顯)의 기록에 또 말하기를”유리왕(儒理王) 때 밀양은 본래 추화군(推火郡)으로 군 이름을 고치지 않았다가 32왕(王)을 지난 경덕왕( 景德王) 김헌영(金憲英) 때에 이르러 비로소 밀양(密陽)으로 불렀다. 그러다 또 18왕 을 지 난 경명왕(景明王) 때에 이르러 분봉설(分封說)이 나왔다.”라고 하였다. 규정공파(糾正公波)의 만력(萬曆) 경신보(庚申譜) 첫째 장을 상고하건대 8군(君) 을 열서(列書)했는데 밀성군(密城君)을 밀양(密陽)에 봉했다고 했다. 밀성이 란 칭 호는 과연 경덕왕 이후에 있었지 유리왕 때에는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