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그 후 삼가(三嘉)에 사는 사람 박태순(朴泰淳)이 그 보첩(譜牒)을 만들어 가지고 재(齋)에 왔는데 그 책머리에 쓰이기에”시조는 재위 61년 만에 훙(薨)하고 , 그 7 일 후 왕비가 훙하여 사릉(蛇陵)에 장례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에 내가 크게 깨닫고 사릉은 합장(合葬)이며 이른바 7일 만에 해체(解體)되었다는 말은 왕비께 서 돌아가신 것을 말 한 것임을 알았다. 세속에서 이를 인하여 괴탄한 말을 하는 데도 세상에 변론하는 사람이 없어 슬프다. 또 신라의 풍속에 왕의 장례에 는 남 녀 각 5인을 순장(殉葬)하다가 지증왕(智證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금했다 . 그러 니, 남해왕 파사왕 유리왕도 모두 합장이요 남녀 각 10인을 순장했기 때문 에 능 의 제도가 혹 가로놓이거나 긴 것도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아, 단궁(檀弓)에서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노(魯)나라 사람은 남편에게 부(祔) 한다.”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순(舜)임금을 창오(蒼梧) 들판에 장례했다고 하였는 데 대개 2비(妃)가 따 라 죽지 않은 것이다. 또 강목(綱目)에 이르기를”한 (漢) 건 무(建武) 27년 황제의 외삼촌 번굉(樊宏)이 병들어 유언하기를 “관구(棺柩 )는 한 번 사용하면 다시 보아서는 마땅치 않다. 만일 다시 보아 썩어 있으면 효자 (孝子) 의 마음이 상할 것이다. 부인과 함께 같은 분(墳)에 2장(藏)으로 하라.”하니 , 조서 (詔書)로 따랐다.”그 각주(脚註)에 옛날 합장 이장(合葬異葬)은 번굉(樊宏 )으로부 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이로써 말하자면 서경(西京)의 풍속은 대저 합장 이었고 신라시대에는 양한(兩漢) 시대와 시종 같았으니 왕의 합장도 형세가 그랬던 것이 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식자(識者)들은 말하기를”경주부 남쪽 황남리( 皇南里) 의 수많은 구릉(丘陵)은 모두 왕릉(王陵)으로 미추왕(味鄒王) 내물왕(奈勿王 ) 능도 그 가운데 있으며 모두 합장이다.”라고 하니, 이는 지언(知言)이다. 이미 오릉변 (五陵辨)을 지었으니 또 이와 같이 서술하는 바이다. 아아, 오릉변은 가군(家君)께서 지은 것이다. 지난번 숭덕전(崇德殿)에 계실 때 이 두 글을 지으니, 경향(京鄕)의 사우(士友)들이 많이 베꼈었다. 그러다 불행 하게도 아버님께서 정묘년 돌아가시고 유편(遺編)만 남아 있는데 아직도 손때가 새롭다. 슬프다. 아, 전후로 지으신 글이 극진한데 다만 그 사이에도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 왜냐하면 동경지(東京誌)에 왕이 승천한 7일 만에 오체(五體)가 흩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