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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지금 의심되는 것은 그 제도가 네 능 에 비해서 가장 작은 이것을 알 수 없 는 것이다. 또 시조의 능이 서향인 것이 한 의심인데 그 역시 증거가 있다. 신라시대부 터 지 금까지 박씨(朴氏) 성으로 복(福)을 받는 자들은 모두 시조의 휘(諱)를 부 르면서 서로 이끌고 전(殿)에 꿇어앉아서 동향하여 공경을 표하니, 이것이 어찌 예 사 후 인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서 그렇게 하는 것이겠는가? 천고 이전부터 전 해오는 풍속임을 상상할 수 있겠다. 아아, 신라시대의 예 를 비록 말할 수는 있으나 지금 상고하려면 징험할 만 한 문 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정(蘿井)에서 백마(白馬)가 울었다는 일이나 오릉(五 陵)이 오체(五體)가 흩어져 땅에 떨어져서 생긴 설이라는 등 분분하게 착 오되고 망령되게 나온 것인데 상하 2천년 동안 아무도 변론한 사람이 없었으니, 통탄함 을 금할 수 있겠는가?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과 문창후(文昌侯) 최치 원(崔致 遠) 같은 이가 신라의 명유(名儒)로서 후생을 계도해 주었는데 그 글에 조금도 이런 문제가 보이지 않은 것은 왜인가? 당 시 한 세상이 모두 노불(老佛)에 휩쓸 려서 그런 것인가? 나라의 선비 사대부(士大夫)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경주를 지난 자가 대범 몇 사람이나 되어 혹 나정과 오릉 사이에서 절을 올리거나 시를 읊은 자가 많았는데도 여기에 대해서 한 사람도 언급한자가 없는 것을 괴 이하게 여겼다. 내가 후손으로서 숭덕전(崇德殿)에 조석으로 제사를 올리면서 여가 시간 에 들은 바를 대략 적어 변증하는 바이다. 기미년(己未年) 늦가을 내가 상현재(象賢齋)에 있으면서 오릉변(五陵辨)을 짓고 능의 제도를 자세히 보려고 원릉(園陵)을 걷고 있는데 마침 한 박씨 성을 가진 시람이 그 아내와 함께 시조능 앞에서 제사를 올리는데 제수 몇 그릇에 밥 이 두 그릇인데 동쪽을 향해 예배(禮拜)를 올리고 있었다. 내가 일찍이 한 지사(地師)를 만났더니 그 가 말하기를”신라시대 능은 모두 합장 (合葬)이다.”라고 하여 여기에서 밥그릇이 두 개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박씨가 말하기를”나는 본래 아는 바가 없지만 예로부터 이렇게 해왔습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빙그레 웃으며 의심하던 마음을 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