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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薨)하고 석탈해(昔脫解)가 즉위했다. 왕을 사릉(蛇陵)에 장사지냈다. 이보다 앞서 왕이 병 이 나자 신하들에게 말하기를”탈해는 국척(國戚)으로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공명(功名)을 드러내어 짐(朕)의 두 아들이 그 아들에 게 사위를 막론하고 나이가 많고 어진 자 가 왕위를 계승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과인(寡人)이 먼저 즉위했으니 이제 마땅히 그에게 왕위를 전해야 한다. 내 가 죽 으면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도록 해서 유훈(遺訓)을 어기지 말라.”하여 이때에 이르러 즉위한 것이다. ○권근(權近)은 이렇게 말했다. 하후(夏后) 이래 반드시 왕위를 그 아들에게 전하는 것은 비단 후세(後世 ) 난세 (亂世)에 종사(宗社)를 중히 하려고 해서이다. 전해오다 다른 성씨에게 전 해지는 것을 혁명(革命)이라 하여 조상의 사당(祠 堂)이 혈식(血食)을 받 지 못한다. 유리왕 이 아버지의 난명(亂命)을 따라서 갑자기 탈해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니, 그 경중 (輕重)을 모르는 것이 심하다 하겠다. 만약 이성(異姓)에게 전하더라도 시조 가 있 으면 된다고 하면 신 은 그 자손이 아니면 제향을 받지 않는데 어찌 혈식( 血食)을 받겠는가? 만약 요(堯)임금과 순(舜) 임금이 선양(禪讓)한 것을 가지고 말 한다면 천하라는 공(公)을 위하여 천하의 사람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 해왕이 사위에게 전한 것은 국가를 사(私)로 여겨 아들과 사위의 경중을 구분하지 않은 것이니 어찌 감히 무슨 말을 하겠는가? 탈해왕(脫解王) ○을축(乙丑) 석탈해(昔脫解) 8년-한(漢) 영제(永帝) 8년- 봄, 3월 왕이 어 린아이 알지(閼智)를 얻어 길러 아들을 삼았다. 왕 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 始林)의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국호(國號)를 삼았다. 미추왕(味鄒王)은 알지 의 7세 손이다. ○정묘(丁卯) 석씨(昔氏) 탈해왕(脫解王) 10년-한(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10년-